세 번째 편지 잘 보았네. 절묘하더군. 우리말에 가장 바탕이 되는 단어 셋을 든다면 ‘이다, 있다. 하다’가 아닐까. 우리의 생각이란 게 말의 손바닥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하니 저 셋은 사람의 존재와 근거, 동작을 뒷받침하는 말 중의 말. 술잔이 없다면 따르는 술을 받을 수 없듯, 저 셋이 아니고서는 모든 존재는 지상에서 사실 성립 불가능할 것이네.
그 자격을 부여하는 보조격 조사인 “이다” 앞에 놓인 그 어떤 존재는, 그 모양과 태도를 가지고 지상에 ‘있다’가, 하여간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시간과의 쟁투에서 그 어떤 행위를 ‘하다’가 어느 날 훌쩍 이승을 떠나는 것. 이처럼 ‘이다-있다-하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듯 한 퀘로 우리를 아우르네. 모든 유전자가 이중나선이듯, 모든 존재들의 삼중나선처럼.
이 중에서 모든 동작의 근거로서 가장 역동적인 ‘하다’를 이리저리 부려서 뜻밖의 장소로 안내하는 솜씨가 대단해. 자네 편지를 읽자니 단순한 말의 유희가 아니라,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사태들의 배후를 슬쩍 한번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네. 표면으로 본다면 얽히고 설킨듯 해도, 동사와 형용사는 물론 접속사까지 넘나드는 저 ‘하다’의 변용이 곧 세상사를 지휘하는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한편, 자네가 정확하게 지적하다시피 세상은 부정어가 득세하네. 어쩌면 ‘하라’는 말보다는 ‘하지 마라’가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네. 고전의 한문에도 부정을 뜻한 ‘아니 불(不)’자가 엄청 많다네. 사람들이 탐독하는 <논어>나 <노자>도 첫 문장은 모두 부정문이지.
부정문이 왜 이리 많은가. 이 또한 가만 살펴보면 짐작 못할 바가 아니지. 우리 사는 세상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건 사실 드물다네. 그렇다며 뻥뻥 치는 큰소리는 사실 나중에 대부분 헛소리에 불과하지. 애초 인간이란 어떤 사태나 사물에 대해 ‘그것은 이것이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소양과 지혜가 어디에도 없다네. 냉정하게 말해 인간이 전 생애에서 활동하는 동안, 제정신인 경우가 몇 년이겠는가.
사람의 한 평생의 주기를 보면 대부분, 태어남-철듦-공부-또 공부-생업 종사-기력쇠진-망각-치매의 순서. 소설 <돈키호테>는 이 순서를 일부 헝클어뜨리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젊은 날 미친 상태로 세상에 나섰다가, 천하주유를 거친 뒤, 문득 나름의 깨달음을 얻고, 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와 죽음에 든다네. 순서가 역전된 셈이지. <돈키호테>가 근대 소설의 시작, 소설 중의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건 이런 배경이 아닐까.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외부에 대해 ‘이것이 아니다’ 라고만 겨우 모기만한 소리로 말할 수 있을 뿐.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가 그렇게 부정의 정신으로 무장했기에 이 세상은 여지가 많은 곳으로 변한다네.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밀고 나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네. 그것을 그것이라 하면, 종점에 도착한 버스처럼 그것이고 말지 않겠는가. 이런 미확정적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종점을 지나 오솔길로 가서, 하늘의 궁둥이를 만지러 산꼭대기로 가지만, 그곳에서 또 저만큼 공중으로 아득히 훌쩍 달아난 하늘만 확인하고 또 내려오네. 그게 전부이고 그 과정을 즐기는 게 부정의 정신이지 않을까.
우리말에 저 3단어가 바탕을 이루듯, 우리 사는 세상도 두 가지 맥락이 있다고 보네. 그것은 <부정>과 함께 <수동태>에 관한 생각이지. 우리 사는 세상을 가만 관찰해보면, 능동적으로 산다고 까불어 보지만 실은 삶의 모든 양식은 수동태가 기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세상에 온 것부터가 전혀 본인의 의도나 선택 없이 그저 피투(被投)되어 이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졌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형식이 모두 수동태이네. 본다는 것도, 빛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가능, 먹는 것도 식물들처럼 광합성에 의한 독립영양이 아니라, 외부에서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니 내가 능동적으로 산다는 것도 실은 이 수동성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
우리 생(生)의 아득한 심연에는 이 <부정>과 <수동>의 두 가지 성질이 밧줄처럼 놓여 있다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런 속성을 간파해야만 이 세계 속에서 나의 좌표를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란 이 속성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끊임없이 강구할 수 있지 않을까.
말머리를 자네의 인상적인 글귀로 시작했다가 전혀 낯선 골목을 돌아나온 기분이 드네. 이 또한 편지쓰기가 주는 뜻밖의 즐거움이라 여기기로 하세. 전에 이번 편지에서는 <흙>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편으로 미루어야겠네. 자네 글 중에서 “깨진 항아리”가 마음을 파고 드는군. 다음 편지는 그 항아리의 파편에 흙 한 줌 놓는 것으로 시작해볼까, 마음을 내보지만 내일의 일은 내일에 가서야 알 수 있는 것. ㅎㅎ
어느덧 하지, 夏至. 여름을 뜻하는 하(夏)는 그렇다치고 지(至)가 참 그윽한 글자네. 도착하거나 이르런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극하다는 뜻을 가지지. 우리가 마음을 모아 어느 경지에 오른다는 것, 하루를 터벅터벅 걸어 저녁에 도착하는 것, 다 이런 뜻을 아우르는 말일세.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서야 그것은 임무를 다 마친다는 뜻이겠지.
요즘 더위는 어쩐지 예고도 기미도 없이 그냥 들이닥친 듯하네. 아마 공중의 날씨도 누군가에게 급히 쫓기는 듯하네. 이즈음의 절기인 ‘입하-소만-망종-하지’는 논농사를 위해서 고랑으로 찾아드는 물의 속도만큼이나 여유있고, 그윽하고, 풍부한 느낌이었지. 하나 최근에는 이런 두터운 속도와는 달리 밭은 등고선의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 듯 너무 급히 찾아온 여름이네. 그간의 생활 감각으로는 아직 매미 소리도 없는 여름의 초입에 불과한 듯한데, 정작 본격 여름이 도래하면 그 얼마나 더울까, 공포스러울 지경이네.
<아저씨>를 인생의 드라마로 꼽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여럿이네. 그 중에 빛나는 대사가 많지만 가령 이런 대목에서 너무 일찍 날개가 꺾여버린 고 이선균 배우를 떠올리며 동훈(이선균 분)이 지안(아이유 분)에 했던 마지막 대사에 울컥하는 이들이 많은가 보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