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단편 |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한(漢)글자 아넥도트 | '처음 初'에 대하여
🗓️절기-록 | 허벅지에 솥단지 끼고 흙 먹는 심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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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꿍이의 말
무더운 날씨, 휴가 계획 다들 세우셨나요? 이미 휴가를 떠나신 구독자분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절기-록>은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염소뿔도 녹는다는 '대서(大暑)'를 이야기합니다. 더위 속에서 진한 흙 향이 나는 서신, 시원한 실내에서 감상해 주세요 🪭
그리고 출근길에 읽는 단편 이야기, <이달의 단편> 코너가 돌아왔습니다.
출근의 고달픔을 돌아보며 읽어보시면 더 고달파질 수 있으니 출근길 주의! 경고 하나 붙여둡니다.. 공교롭게도 이어지는 <한(漢)글자 아넥도트>의 제시어는 '처음 初' 입니다. 보통 쓰이는 처음 먹은 마음이 아닌, 해탈과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초심인데요. 여기서 느껴지는 묘한 엇갈림을 음미해 보시면 레터를 더더욱 즐길 수 있으실지도요.
🎀이벤트 이야기
저희 《궁리함》이 지난 15일로 10호를 맞았다는 사실, 다들 아시나요? 😊
이를 기념하여 구독자 선물 이벤트가 진행 중인데요..
두 명을 선정하여, 이케아 빈티지 케이스에 선물을 담아 보내드릴 예정이니
구독자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
여전히 “궁리함에 의견 남기기”까지 선물 준비되어 있으니,
선정되지 않으셨다고 해도 실망하지 마시고 의견 많이 넣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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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단편 |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지음 | 조호근 옮김
🤔꿍꿍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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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단편 「The Real Thing」에서 이야기한 기억의 소중함에 이어, 필립 K. 딕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소개 드리려 합니다. 영화 <토탈 리콜>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이 단편은 <매트릭스>, <트루먼 쇼>를 비롯한 현대 창작물들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되었는데요. 어느새 단골 주제인 미래 기술에 파생되는 디스토피아 서사도 물론 두고두고 즐길 요소이지만, 일단 제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을 위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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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거야. 나는 죽기 전에 화성에 가겠어. 그는 생각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꿈을 꾸는 그 자신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의 햇살이, 아내가 침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상의 소리가, 모든 것이 그가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심한 저임금 사무직일 뿐이지. 그는 씁쓸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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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대목을 출근길 버스에서 읽고야 말았습니다. “출근을 해야겠지. 그렇게 될 운명인 거야.” 세련되지 않은 문장을 구사한다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이 부분만큼은 전 세계 회사원들의 폐부를 꿰뚫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회사로 향하는 얼마나 많은 승객들이 로또에 대해, 그리고 있지도 않은 거금을 유용할 계획을 착실히 세우고 있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여느 사무원과 마찬가지로 꿈을 찾아 떠날지 말지 고민하던 주인공. 현실과 타협안으로 가짜 기억을 심어주는 회사 '리콜'(Rekall)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을 주입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실제로 화성에 다녀왔으며, 또 실제로 자신이 비밀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고, 결국 다른 요원들에게 붙잡힌 주인공은 비밀 임무와 신분을 잊기 위해 자신이 가장 염원해오던 환상을 심어달라고 부탁하게 되는데요.. 그 환상은 … 단편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무원의 자조는 문학작품에 유구히 등장해왔지만 업무로 지친 심신을 여행과 맛집 탐방으로 해소하는 요즈음, 이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가 더욱더 독자들의 마음에 가닿지 않을까 싶어요. 리콜Rekall 만큼은 아니더라도 도매가로 파는 기억에 가장 가까운 상품은 어쩌면 바로 '책'이 아닐까요? 필립 K. 딕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환상은 아무리 설득력 있는 것이라도 그저 환상일 뿐이었다. 최소한 객관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본다면―완전히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휴가를 떠나지 않더라도, 그리고 휴가를 떠나더라도 책과 함께하는 여름이 되시길 권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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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글자 아넥도트│ '처음 初'에 대하여
李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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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능선은 칼바람으로 알아주는 능선이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풀들은 달려드는 것 같기도 하고, 물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냉정히 관찰하면 지나가는 등산객의 발걸음에 무언가 영향력을 미치려고 골똘히 궁리하는 중이겠다.
아무리 작은 풀일지라도 저만의 세계가 있는 것. 어쨌든 엉덩이나 바지, 등산화 뒤꿈치에라도 뛰어올라 슬쩍 풀씨라도 묻혀 제 후손을 멀리멀리 보내려는 은근한 전략이다. 그런 풀들 앞을 지나다가 문득 무덤 하나를 만났기에 작은 문제를 하나 낸다. 저 멀리 아찔한 풍경을 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우리가 초상난다고 할 때의 그 초, 자가 무슨 초일까요?
난데없는 질문에 답들이 쏟아진다. 장기판의 ‘초나라 楚’? 죽어 초상화를 그리니 ‘닮을 肖’인가요? 시분초 할 때의 그 찰나같은 시간의 ‘초 秒’? 죽음이란 누가 초대하여 부른 것이니 초인종처럼 ‘부를 招’? 누가 들어도 끄덕일만한 근사한 대답.
바로 곁에 냉정한 풀이 있다. 이 시절, 소백산 정상에서야 흔하지만 아무 곳에서 쉽게 볼 수도 없는 귀한 꽃. 냉초다. 그 이름에 맞춰 냉면에 궁합이 맞는 ‘식초 醋’? 왁자한 웃음 속에 이런 정중한 답도 있다. 죽음이란 이 땅밑의 뿌리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풀 草’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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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럴싸한 답이긴 하지만 모두 아니다. 초상나다,라고 할 때의 초는 아시다시피 ‘처음 初’이다. 초중고라고 할 때의 그 初다. 시작이나 출발을 뜻하는 初.
初喪. 처음 초, 죽을 상. 누가 돌아가시어 상을 당함. 요즘 장례는 대개 삼일장(三日葬)이다. 예전의 장례는 삼년상이 기본이었다. 그 삼년상의 첫해에 맞는 절차, 첫 번째 치루는 의식이기에 初喪인 것. 한편 이런 뜻도 있다고 한다. 처음이란 시작이란 뜻도 있다. 그러니 초상이란, 이미 일어난 죽음의 예법에 맞게 슬픔이 차례차례 시작된다는 뜻도 가진다는 것.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이윽고 죽는다. 자명한 진리이다. 생과 사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누구는 윤회의 메커니즘에 한 자락 기대기도 한다. 몇 생을 거듭하여 이승에 왔지만, 이 또한 천사가 손가락으로 인중(人中)을 누르는 바람에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러니 이런 건 어떤가. 이번 생에서 죽는 것, 그건 처음으로 죽어보는 것이기에 初喪이다. 그렇다면 해탈을 얻을 때까지 앞으로 얼마를 더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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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록 (9) │ 허벅지에 솥단지 끼고 흙 먹는 심정으로
李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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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끝나고 바로 폭염이네. 언제 또 폭우와 폭염이 연쇄적으로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른다네. 날씨에도 등고선이 있어 그 지도를 작성한다면 가는 선분들이 그냥 딱 서로 들러붙을 것 같군. 그 가파른 선분 위에 건설된 현대의 문명. 점점 세상은 근육은 말라 없어지고 뼈만 남는 육체의 기괴한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네. 어디 한 발 재겨 디딜 데를 허락하지 않는 날씨의 높낮이. 그야말로 곧 무너질 탑처럼 날카롭고 아찔한 낭떠러지일세. 그 벼랑 위에 몰린 사람들의 살림살이. 지금 우리를 포위한 기후의 형국이 바로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네.
시간이란 오묘해서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을 세상에 드러낸다네. 시간은 억수로 신출귀몰해서 어제와 내일의 제 모습을 한번도 들키지 않는다네.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게 시간을 볼 수가 없기에 망정이지 어제-오늘-내일을 우리가 한꺼번에 동시에 볼 수가 있다면 참으로 기관이기도 할 것이네. 그야말로 인류라는 족속은 놀라자빠지는 대책 말고는 아무런 동작을 취할 수 없지 않겠는가.
자연도 참 신기하네. 이제껏 자연이란 내 바깥의 저 풍경들이라고 생각해 왔지. 나무와 돌, 구름과 태양.....바람과 비. 짐짓 나하고 상관 없고 그저 지나치면 그만, 눈 감으면 캄캄해지는 것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네. 저 속에 神이 있고, 아니 자연이 곧 신 자체이고, 저 속에 세계가 있고, 저 속에 말(言)이 있다는 게 철학의 가르침. 오래전부터 마냥 주입되어 온 지오디(God)와는 사뭇 다른 개념의 신이라네. 나의 딱딱한 선입견을 몰아내기가 정녕 힘들군.
공자께선 하늘이 무어라 말을 하던가, 하셨지만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네. 해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쏟아낸다네. 이처럼 나도 자연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만, 자연도 실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저를 알 수 없을 것 같군. 그러기에 이리도 구름처럼 많은 생각을 주고, 비처럼 많은 말을 흘리게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연은 이런 여름이면 입이 아주 큰 곤충 같은 무더위를 보내 나의 전신을 꽉꽉 물어대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자연은 ‘나의 자연’인 것. 내 어깨가 비좁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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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지에 자네가 언급한 깨진 항아리 이야기를 조금 하겠네. 어느 해 안동의 하회마을에 갔을 때의 일. 어느 고택의 툇마루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데 기와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는 곳에 놓인 기와 화분을 보았지. 기와는 반쪼가리였지만 그 보잘것없는 화분에 소담하게 채송화가 곱고 완벽하게 자라더군. 그 이후, 알록달록한 화분도 좋지만, 버려진 기물을 활용하는 화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
예전에는 깨지기 전의 완성된 것만을 정상으로 여기고 일단 깨진 건 그냥 내다버리기에 급급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 이제 생각을 조금 달리 고쳐 먹네. 깨진 것은 깨진 것으로 저의 한 세계를 또 새로 이룩하여 나간다는 것. 따지고 보면 하나에서 둘로 나뉘는 세포분열의 방식도 이런 류와 거의 같은 원리가 아닌가.
깨진 항아리 조각이 깨진 뒤의 한 조각으로 태어나 전혀 다른 화분의 역할을 훌륭히 한다는 것. 그러자 등산화 화분, 주전자 화분...등등이 쓰레기 더미에 처박히기 직전 돌연 흙과 꽃을 품게 된 뜻밖의 화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 집집마다 고유한 화분은 차고도 넘치네. 누군가 가게 유리창 너머 전시된 알록달록한 상품으로 보고,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예쁘장한 것들’이라고 했다는데 그 대목이 생각나는 경우였다네.
그 깨진 항아리, 물론 그 항아리도 흙을 구운 것이지만, 이미 조성이 변해 딱딱한 문명의 끝 물이 되었지. 그 항아리의 작지만 옴방한 품에 반죽한 밀가루처럼 흙 한 줌 퍼담으면, 항아리는 흙덩어리를 잘 품고, 식물은 그 면적에 맞게 뿌리를 뻗고, 어엿한 안방처럼 야생화 몇 쪽을 잘 키운다네. 간간이 빗물도 찾아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니 이야말로 조화정(造化定)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늘이 굳이 백화점 진열대의 ‘예쁘장한 것’들만 골라 찾아다닐까.
이런 흙은 내가 오래전부터 이리저리 둥글둥글 만져온 주제이기도 하네. 그냥 너무 많고, 너무 흔하고, 너무 압도적인 존재라서 그냥 마땅찮게 대해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오늘은 혼자 사는 집에서 설겆이를 하다 말고, 창밖을 보다가 얼핏 그런 매우 친근한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 이젠 나의 피부도 저 흙과도 머지 않아 하나로 섞이겠군. 생각할수록 흙이란 참 내가 함부로 대해서는 결코 안 될 물질. 그간 흙 앞에서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하룻강아지였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네.
성북동 비둘기의 주소만 산 일번지가 아니라 예전엔 우리 사는 주소도 거의 산의 번지였지. 요즘이야 개발이 막강하게 진행되어 그 주소가 사라지고, 이젠 저 낭떠러지 위, 번지조차 없는 곳이 우리의 발바닥 아래의 주소이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는 24절기 중에서 대서(大暑)를 통과 중이네. 더위는 그 꼬리가 너무 길어서 더위를 관리하느라 칸칸마다 한 움큼씩 잘라서 보관했다는 생각이 드네. 무슨 연유일까. 하지-소서-대서. 우리가 만든 이 용기(容器)가 이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위의 용량이 변했다는 생각이 드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기물을 바꾸려고 해보지만 그건 근본적인 방도가 아닐 것일세. 우리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이 바뀔까.
그제 소백산 도솔봉 지나 막걸리로 유명한 대강면까지 높고 깊고 그윽한 길을 걸었네. 덥고 후끈한 기운을 마음껏 섭취하고 내려와 밥 먹으러 가는 길에 만났지. “흙 팝니다”. 이 광고가 무슨 말인 줄이야 다 아네만, 조금 다르게 들리더군. “허벅지에 솥단지 끼고 밥 먹듯(허수경)”, “흙 한 숟가락(정현종)”씩 마구마구 퍼먹고 싶다는 생각이 식당에서 진하게 들더군. ㅎㅎ
대서. 아주 큰 더위. 아직 땡볕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입추가 저기 벌써 기다리고, 백로와 추분이 우아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네. 달의 경로는 이탈하는 법이 없는 것, 그것은 말의 힘이기도 하고, 끝내는 흙의 힘이기도 할 걸세. 더위먹는다는 말이 있네. 밥처럼 더위를 먹는다는 건 아니고, 가는귀 먹는 것처럼, 더위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긴다는 뜻. 아무튼 더위, 잘 다스리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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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함 제11통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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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출판 kungree@kungree.com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325-12 (10881) 031-955-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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