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록 | <에이리언>과 <트위스터스>
🎙️책 밖에서 만난 작가 | 『양반의 초상』 저자 인터뷰
한(漢)글자 아넥도트 | '만물 物'에 대하여
📗초교 독후감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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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꿍이의 말
여름은 공포영화의 계절! 유난히 긴 이번 여름, 오싹오싹한 공포영화를 즐기신 구독자분도 있으시겠지요? 저는 이번에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봤는데 잘 만든 프랜차이즈 영화는 영화 티켓값의 재미를 확실히 보장할 수 있구나 싶었답니다. 마찬가지로 재미와 감동을 보장하는 궁리함의 프랜차이즈 연재가 이어집니다. 무더위를 무서운 영화로 다스린 꿍꿍이의 <절기-록>, 그리고 신간 <양반의 초상>의 하영휘 저자 인터뷰가 구독자 여러분의 더위를 몰아내는 데 한몫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무시무시한 신간 소식 그리고 ...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기하학"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쉽게 가르쳐 줄 신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하학』 초교 독후감으로 먼저 만나보세요. 그리고 일상 속의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이갑수 대표의 <한(漢)글자 아넥도트>까지. 한여름의 공포영화처럼 재밌는 궁리함 제12통 발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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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록 (10) │ <에이리언>과 <트위스터스>
꿍꿍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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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났건만 선선한 바람은커녕 열대야마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기승을 부리는 여름도 거짓말처럼 물러난다는 '입추 매직'도 이제 옛말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스콜이 일상이 되었고 가을인가 싶으면 겨울이,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 시작되네요. 바야흐로 기후위기의 임계점을 넘어서 절기의 마지노선도 무너진 듯 보입니다. 자연을 사랑하시는 대표님도 이 날씨와 문명을 낭떠러지라고 표현하셨지요. 부쩍 우울해 보인 저번 서신에 신경이 쓰입니다. 절기 없는 '절기-록'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더위는 형체 없는 생각마저 녹여버리네요.
지난 주말엔 극장으로 피신하여 4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에이리언>이 영화로만 거의 10편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아실까요? 이번에 관람한 <에이리언: 로물루스> 이후에도 프리퀄 <에이리언: 어스>가 내년에 개봉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엔 무서운 이야기를 보는 게 너무도 괴로워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기도 했었는데요. 현실이 더 무서운 걸 알게 된 건지 이젠 공포영화가 재밌기만 하고 괴기스러운 장면도 어떻게 연기했을까 어떻게 찍었을까 조금 많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로물루스>는 20세기에 제작된 <에이리언>에 대한 오마주, 타임라인에 적절히 분배된 장르 영화적 쾌감, 현시대에 발맞춰 재조정된 인종, 젠더, 윤리관과 더불어 볼만한 프랜차이즈 영화였습니다. <에이리언>은 아마도 대표님과 제가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관객만 있다면 다음 세대,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겠지요.
이것은 비단 <에이리언>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아이언맨'의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마블 스튜디오의 빌런 '닥터 둠'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전엔 <로건>에서 감동적으로 퇴장한 '울버린'이 <데드풀과 울버린>으로 돌아왔지요. 프리퀄과 시퀄의 선형적 세계관은 멀티버스로 인해 무한한 지평을 맞이한 듯 보입니다. 이때까지 수용자들의 활발한 2차 창작을 생각해 보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개봉관의 영화와 관객수 그리고 홍보기사를 보다 보면 무언가 양상이 달라지긴 달라졌습니다. 줄어드는 개봉 신작(관객)과는 반대로, 늘어나는 시퀄과 프리퀄, 스핀오프, 리메이크(관객) 등으로 이어지는 콘텐츠의 연장은, 나아가 저희의 공적인 삶과 일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4-50대 중년들이 인스타그래머블한 삶을 전시하며 '영 포티', '영 피프티' 같은 말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2-30대 청년들은 그런 그들을 경멸하며 '진정한' 젊음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영원한 젊음에 대한 선망은 실내에 틀어둔 에어컨처럼 쾌적한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상징이 된 것만 같아요.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굳이 묻자면 영원할 것만 같은 여름 아니면 겨울이 반복되는 날씨에게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따져보면 날씨야 말로 문화, 사회, 경제, 역사, 생산과 유통 등 모든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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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날씨와 소통하기 위해선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말간 관람한 영화 중에는 날씨와의 소통을 다룬 작품도 있었습니다.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의 신작 <트위스터스>인데요. 이야기는 주인공이 대학시절 토네이도를 쫓다 친구들과 애인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세월이 흐르고 뉴욕 기상청 직원이 된 주인공. 다시금 두려움과 마주하고 토네이도를 소멸시킬 방법을 찾게 되는데요. 이를 '길들인다'라고 표현합니다. 두려움은 맞서는 게 아니라 길들이는 거라고 말하면서요. 어떤 대상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이해해야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두려움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덤벼들기도 해야하는데, 그것을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알 수가 없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 영화였습니다. 그 결과 주인공은 믿음을 회복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변화합니다. 진부하다면 진부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왠지 잠깐 작품 속 등장인물이 부러웠어요.
영화 속 재난이 아무리 무자비하다 해도,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의 일상화가 훨씬 무시무시하고 광범위한 재난 아닐까 합니다. 점심 먹고 바깥을 잠깐만 걸어도 더위 먹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엔 출판 이야기가 줄었는데 사실 제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출판 이야기이기도 한 것을 대표님께서는 아시겠지요. 토네이도의 등급은 소멸 이후 재난에 맞춰 정해지는 사후적인 것이라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위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늦추지 않으면서 재난을 잘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선선한 바람이 간절한 요즘이네요. 극장에서라도 잠시 시원함을 느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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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밖에서 만난 작가│『양반의 초상』 저자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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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안녕하세요. 궁리 독자들과는 처음 만나시는데,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A1. 안녕하세요. 하영휘입니다. 저는 고문서 조각을 갖고 놀기를 좋아합니다. 거기에 담긴 인간의 욕망과 부조리를 궁리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Q2. 『양반의 초상』은 조선 후기 유학자 조병덕의 편지를 통해 당시 양반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입니다. 무려 1,700여 통에 달해, 조선시대 개인이 쓴 서간문으로는 최대 분량인데요. 이 편지들을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A2. 제가 당시 아단문고(현 현담문고)에서 고서와 고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어요. 가득 쌓인 박스를 하나하나 풀어 정리하던 중 조병덕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감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이는 한 뭉치의 편지를 보니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라는 감이 오더군요. 글씨, 종이, 먹색 등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편지의 필자가 19세기의 유명한 유학자 조병덕이라는 것을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Q3. 지난 2008년 초판(『양반의 사생활』, 푸른역사)이 나온 후, 16년 만에 새로 단장하여 독자들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간 복간을 기다리시는 독자가 제법 있었는데요. 초판과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소개해주세요.
A3. 초판이 나온 것을 보니, 책이 읽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어려운 낱말과 용어가 많았어요.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어려운 낱말은 가능한 한 쉽게 풀어쓰고, 어려운 용어는 바로 옆에 괄호를 하고 설명을 넣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주가 필요 없어져서 없앴습니다. 읽기가 쉽고 편리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초판에 편지 원본 사진이 많이 들어갔는데, 그림이 너무 작아요. 조병덕의 초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돋보기로 그걸 보느라 노력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차제에 원본의 석문(탈초)까지 실었습니다. 초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초서도 석문과 대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영휘 작가의 인터뷰 전문을 확인하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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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글자 아넥도트│ '만물 物'에 대하여
李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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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글과 한자는 엄청 다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자와 한문도 무척 다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한자가 병기(倂記)된 국어 교과서로 배웠다. 요즘보다는 한자에 어릴 적부터 노출(露出)된 셈이다. 한자? 은퇴하시고 젊은 시절 배운 한학 공부를 소일거리로 삼은 선친의 낭송소리에 훈습(薰習)된 탓도 있겠지만 한자와 꽤 친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셈이다. 다행이었다. 나도 한자가 싫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예의 버릇대로 대강, 흐릿히, 어영부영, 하나마나, 시부직이, 비스듬히, 엉거주춤. 한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꼭 그것이었다. 한 마디가 늘 부족했다. 더러 옥편을 뒤지며 가지고 놀기도 했으나 한자에서 한문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겨우 내 이름만큼의 세 글자에서 하나 더한 사자성어(四字成語)나 떠듬거릴 정도였다. 거기에 하나만 더하면 5언 율시(律詩)이고 다시 두 발짝만 더 하면 7언 절구(絶句)로 이어지는 그윽한 한시의 세계. 그리고 조금 심화하면 논어와 맹자의 고전(古典)의 바다. 다만 발목에 찰랑대던 얕은 물이나 걷어차며 그 언저리에서 허우적거린 것이다.
시간(時間)은 벽에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건 우리 눈을 잠시 속이는 것이다. 무슨 일에는 항시 시간이 달려든다. 무쇠뚜껑으로 눌러 닫아도 시간이 작용해야 솥 안에서 밥이 익는다. 무릇 모든 일에는 순서(順序)가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가 한자에서 한문의 세계로 진입하는 데도 꼭 그러하였다. 게으름만 부리다가 하마터면 한문을 모르고 내 인생을 졸업할 뻔하였다. 다행이다. 늘그막에라도 한자에서 한문으로 가는 차례(次例)가 나에게도 왔다.
더듬더듬 한문을 배울 때 고맙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글자들이 더러 있다. 이게 아니면 유리창이나 비상구 하나 없는 건물 속에 갇힌다는 느낌을 주는 한자들. 아래 하(下)도 그랬지만 만물 물(物)도 그렇게 고마운 한자였다. 어느 날, <노자> 읽는데 사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한문에서 物자가 나오면 먼저 ‘사람’으로 번역해 보고, 그게 아니라면 ‘사물’로 번역하세요. (네이버 옥편에는 物에는 14개의 풀이가 나오는데, 11번째에 사람으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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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物은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한자다. 물상, 물리, 생물 등 중고등시절의 교과목에도 나오는 物자는 일찍부터 친숙한 글자이기도 하다. 그 이후 물체, 물건, 사물 등 이른바 사람과 구별되는 무정물로서의 모든 물질을 대표하는 한자였다. 어쩌면 이제껏 나는 사람으로서의 은근한 자부를 이 物이 이룩하는 세계와의 구별(區別)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물질에 기반한 삶을 영위하면서도 은근히 정신을 물질보다 상위에 두었던 것. 동물과 식물, 무생물과의 칸막이도 칼같이 지켰다. 저 풍경과 자연 속 출입도 그저 한번 하는 행사에 그칠 뿐, 줄곧 이른바 안전한 문명의 울타리에 폭 싸인 채 지냈다.
이제까지 物을 경계로 나의 몸과 정신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었다. 옷과 구두와 모자로 나의 특수한 상태를 구분하고 이를 유지하려 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인체가 선택적 투과성 막으로 세포의 신진대사를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듯. 그야말로 物은 완벽한 타자의 세계였다.
그런데, 物이 곧 사물이자 물건임은 물론 사람이라니!
“바닥에는 여지(餘地)가 많다 There’ 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고 한 것은 물리학자 파인만(Richard P. Feynman)이 나노기술의 미래를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문장이다. 극미한 분자 세계를 우주의 공간처럼 광대한 영역으로 상상한 통찰력이 놀랍다. 이 명민한 천재의 말을 살짝 비틀어서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세상의 모든 물질은 바닥에서 만난다. 낙엽을 보고, 무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바닥에는 공간이 풍부해서 아무런 칸막이가 없다.
物의 속성을 알고 마음의 울타리가 거둬지면서 내가 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사람이 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로구나, 하는 구체적이고도 자명한 느낌. 실제로도 그렇다. 저 풍경을 이루는 원소와 이 몸을 구성하는 원소가 절대 다르지 않다. 나무의 가지와 인간의 팔은 똑같은 탄소 성분이다. 또한 동일하게 하늘이 공급해주는 물을 먹고 살지 않는가.
공중을 천천히 배회하던 낙엽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어느 무덤, 어느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는 것을 본다. 몇 단계만 넘으면 나의 몸도 이 나무와 저 솔개와 요 바위와 빈틈없이 포개질 수 있겠다고 나는 받아들인다, ‘만물 物’ 덕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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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교 독후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하학』에 관한 몇 가지 횡설수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하학』 | 래리고닉 시리즈
李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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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하. 幾何. 기하에는 받침이 없다. 거대하다, 고요하다, 우주처럼 아래가 텅 비었다. 흙이나 저녁처럼 바닥에 뾰족한 게 없다. 나와 너, 우리도 그렇다. 그래서 길게 끄는 말의 여운이 있다. 목구멍을 닫기 전에는 끊기지 않는 발음의 깊이가 있다. 서산 너머 지는 달처럼, 서해로 빠지는 석양처럼. 오늘 하루를 어제와 꼭 같이 설계하고 실행한 뒤 깜쪽같이 빠져나가는 거대한 저 기하의 세계.
- 네이버 <열린 연단> 강의에서 득한 내용이다. 동양고전을 전공한 어느 교수님이 서양의 지오메트리에 해당하는 <기하>의 원전이 노자에 나온다고 했다. 노자 20장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오로지 예와 아니오만 있을 뿐, 이 둘은 그 차이가 얼마나 있겠는가)>를 지칭하는 말인 듯했다. 정말 그렇다면 반가운 일일 것이나, 어째 좀 이상하다. 내 짧은 소견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기미독립선언문>에 여러 번 등장하는 저 기하도 기하에서 나온 기하란 말인가.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ㅣ며, 心靈上 發展의 障碍됨이 무릇 幾何ㅣ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ㅣ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ㅣ뇨.”
- 사람의 얼굴, 그 좁은 면적에 이목구비의 네 요소만으로 천차만별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인류가 60억 명이라면 60억 개의 서로 다른 모습이다. 이들은 충분히 구별되고 서로 다르다. 이게 가능하지 않았다면 여권으로 출입국 심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 광활한 우주에서 도래한 먼지들의 집적인 인체라는 건축물에서 이 얼굴의 기하학은 단연 돋보인다. 얼굴 용(容)은 宀(집 면)자와 谷(골 곡)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얼굴 안의 깊은 계곡에 사람의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 냄비에 물을 붓고 요리를 한다. 손바닥 두 개만한 넓이의 냄비에 각종 재료를 넣고 맛을 낸다. 동그라미부터 세모, 네모의 도형들이 끓는다. 이윽고 요리의 완성. 예로부터 국자로 일컬어진 북두칠성. 그 북두칠성 국자로 국물을 얌전히 떠 식탁에 놓으면서 식사는 시작된다. 바닥이 든든한 접시들의 배열은 별자리를 빼박은 듯 닮았다. 직선을 기르지 않는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직선은 젓가락의 길이…이것도 기하라면 엄연한 아침 식탁의 기하학이다.
- 도로가 출근하는 차들로 빼곡하다. 운전대 너머 계기판도 참 오밀조밀한 숫자와 도형의 집합이지만 유리창 건너 앞차의 궁둥이도 요란하다. 세계를 인수분해하면 저 도형들이 나온다. 삼각형, 사각형, 원. 미처 폐곡선이 못 되어 도형으로 태어나지 못한 둥근 곡선들. 그리고 아리바아 숫자들. 바닥과 접촉하면서 맹렬히 굴러가는 바퀴들의 원운동. 이들은 오늘도 무슨 비밀을 캐겠다, 이리도 분주히 합동으로 협력하고 있는 것인가.
- 아무리 고급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해도 접근하는 만큼 풍경은 여지를 두고 물러난다. 빛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듯 풍경의 뒤를 뚫지 못한다. 그 풍경 속의 나무, 바위, 구름, 태양. 우리가 보는 저 풍경까지의 거리, 그러니까 우리의 시선이 닿아 물체로 변화하는 것들까지의 거리가 지름일까. 그것은 거기까지뿐일까.
6-1. 가령 운전하는 내내 고민은 끊임없이 찾아와 온갖 상념에 잠기게 한다. 상처, 추억, 분노….기억과 고함. 거기까지의 거리도 지름일까. 그러니깐 눈에 보이고 생각에 짚히는 그것이 그것의 표면이고 전부일까?
6-2 그럴리가! 그 너머가 있다. 거기까지는 거기까지의 보이는 둘레일뿐, 그 바깥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렇치 않았다면 신화는 어디서 숨을 쉬겠는가. 그저 인간이란 신의 노예로 벌벌 떨며 질식하듯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깐 여기에서 거기까지는 항상 반지름에 불과한 것!
6-3. 무시로 찾아와 나의 생각을 이루어 주는 모든 것들. 아름다움이다 사랑이다 미움이다…하는 모름지기 그 모든 명사들의 표면까지의 거리도 반지름이다. 내 생각이 닿는 그것이 종점일 리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종점을 지나 더 나아간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일단 태어난 뒤 죽음에 순서가 없다는 건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죽음까지의 거리, 이 또한 반지름에 불과하다. 그래서 세계는 이중으로 넓어지고 삼중으로 깊어지는 기하학의 세계.
- 기하를 이루는 큰 식구인 증명은 벽에 못 하나 곧게 박는 것과 같다. 못 하나에 옷 하나 걸릴 때마다 방이 정리되고 깨끗해진다. 헝클어진 세상의 질서가 문득 이렇다.
- 삼각형은 세 변으로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을 골고루 갖는다. 하나만 많아도 잉여다. 네 다리가 세 다리보다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식탁의 네 다리 중 하나는 늘 겉돈다. 사람의 두 다리도 참 대단하다. 자연이 이룩한 온갖 기하학의 무늬를 저 둘로 섭렵하다니! 방금 북한산을 빠져나온 등산객 김씨, 노을에 잠겨드는 능선을 바라보며 오늘 걸었던 지구의 일부 구간, 그 짧지만 깊고 그윽한 선분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8-1. 하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삼각형은 상상 공간의 이상적인 삼각형이다. 실제 실생활에서 삼각형은 그렇지 않다. 만나고 싶은 이 만나지 못하고, 만나지 말아야 할 이를 만나야 하는 삼각관계에서처럼, 우리 사는 위상공간에서 삼각형은 180도도 아니고, 희한하도록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삼각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대부분 정신승리법으로 받아들인다.
- 기하학의 중요한 성질 중의 하나는 평행에 관한 것이다. 평행만 제대로 알아도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자신이 있다. 고등학교 지학시간. 태양에서 방사상으로 뻗어나와 지구에 도착하는 햇살. 하지만 거리가 너무 충분히 멀어 내 등에는 평행하게 도착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분필로 칠판을 때리며 말씀하셨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교실과 파주 궁리출판 사무실은 엇갈린 시간의 공간에서 평행하게 존재할까. 내 그림자를 볼 때마다 나는 그때 그 교실과 평행이란 말을 떠올린다.
- 구름을 쪼개면 빗방울, 나무를 수직으로 쪼개면 장작이다. 벼를 수평으로 쪼개면 동그라미, 방동사니의 줄기 단면은 삼각형이다. 하늘을 쪼개면 무정형의 사람이 툭 떨어져 내린다.
- 번개가 번쩍 치는 순간이 있다. 번개는 삼각형으로 칠까 마름모형으로 칠까, 아침에 눈 뜨고 한 바퀴 등을 구르며 일어나 직립하는 건,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드넓은 세계의 기하에 몸을 꽉 맞추는 행위다. 번개 치듯 또 하루를 시작한다.
- 플라톤이 세운 학당, <아카데미아>의 문지방에는 이런 말이 교훈처럼 쓰여 있다고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 래리 고닉의 책,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하학>의 목차를 본다. 점, 선, 면에서 삼각형, 사각형, 원까지. 이 세상이 낳은 정직한 도형들이 저마다 한 칸씩을 차지하고 책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 세계의 기하, 세상의 통찰력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 책으로 들어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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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함 제12통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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