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하도 더위에 지쳤음인가. ‘寒’이 물어다 준 차가운 기운이 반갑네. 하지만 여전히 낮은 덥고 밤은 추운 상태가 계속 되고 있네. 겨우내 잔설이 골목 어귀에서 5월이 되도록 잠복근무하고 있듯 더위도 좀처럼 제 마지막 발톱을 거두지 않고 있네. 이른바 일교차가 심한 날씨, 각별히 감기에 조심해야겠네.
지난여름 저 무더웠던 열기는 저기 먼 바다에 잘 저축되었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바다는 그 기운을 잘 보관하고 있다네. 내년 입춘 무렵 저 남녁에서부터 봄기운이 상륙하는 건 바다가 그 기운을 대방출하는 덕분이지. 어찌 되었든 이제 슬슬 가을이 완연해지고 있네. 여름의 손아귀도 슬슬 풀려 힘을 잃고 다음 계절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있지. 누가 뭐라 해도 천하의 질서는 한 발짝씩 성큼성큼 전진하고 있다네.
가을 맞이 기념으로 가벼운 말놀이 하나 해볼까. 봄은 본다고 봄이라고들 하네. 스프링처럼 땅을 구름판으로 짚고 튀어오르는 새싹들, 보아 달라 저마다 아우성치는 꽃들. 아니 보고 배겨날 재간이 없도록 누가 여는 잔치판, 보라고 봄이지.
그렇다면 여름이야 여문다고 여름이 아닐까. 따가운 더위 안에서 열매는 여름에 그 계획을 세우지. 겨울에 봄의 기미가 이미 도사리고 앉아 있듯, 벌어지는 꽃잎 속에는 다물어지는 열매의 계획이 이미 착착 들어있다네.
그리고 가을, 간다고 가을일까. “가다, 동사,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다.” 여기서 우리 사전의 불성실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 아무래도 편찬자들은 지상에 발이 묶여 전후좌우의 방향에만 매몰되어 있는 듯하네. 가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지.
나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땡볕을 피해 그늘을 찾는 이가 나무 아래 늘어지게 낮잠 한방 때리고 나서 취할 수 있는 동작이란 고작해야 왔던 길은 되짚어 가는 것. 날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지금은 느끼지 못해도 언젠가는 그 불가항력에 대해 미약한 슬픔을 느끼는 날이 오리라.
그 사이 나무는 제 갈 길을 가네. 나무가 가는 길은 자동차나 자전가 따위가 가는 길이 아니라 비행기나 드론이 다니는 길과도 차원이 다르네. 나무가 걷는 길은 공중을 딛고 하늘로 가는 길. 또한 동시에 지하로 뻗는 길. 가야 하는 가을에는 그걸 알아야 하네.
가을에는 가네. 간다고 가을이네. 이럴 때 이렇게 가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빠지는 것이지. 그래서 가을을 Fall이라 하지 않겠나. 그 어디로 사정없이 빠지는 것. 그래서 사랑의 동사에는 ‘빠지다’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사랑한다는 건 이리저리 재지 않고 그냥 너에게 나를 던져서 온통 빠진다는 것. 발밑의 하수구에 빠지듯 그렇게 사랑하는 너에게.
누구나 한번쯤 빠지는 판소리의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단가 ‘사철가’에도 한로가 여지없이 등장하네. “(.....)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은, 황국 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
사람의 한계를 피부처럼 덮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단 몇 줄로 요령 있게 제시하는 가사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로, 寒露는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뜻이라네. 가기 위해 맺히는 것. 그 기운은 열매로 번지며 천하를 둥긂의 세상으로 빠지게 하네.
저기 가을이 가네. 단풍으로 빠지는 잎사귀, 아래로 투신하며 빠져들고 있네, 낙엽으로 떨어지고 있네. 쓸쓸에도 빠지고 있네. 자네도 가을에는 그 어디로 풍덩, 사정없이 빠지시길!
(사진: 지리산 성삼재에서 만복대 지나 정령치 가는 길. 어느 고갯마루 바위 틈에 홀로 핀 구절초 한 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