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꿍이의 말

🗓️ 절기-록 (14) │ Poetic Justice

꿍꿍이

부쩍 바빠진 업무로 인해 이번엔 조금 짧은 서신이 될 것 같아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가을에 어딘가 빠져보라고 권하셨지만 가을은 온 것 같다가도 없고 간 것 같다가도 아직 저희 곁에 머물고 있네요.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을 지나 입동을 앞두고 있는데 모기를 잡다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때문일까요? 세상이 갈수록 살기 팍팍해진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퇴근길에도 짜증이 솟구치곤 하네요.

근래에는 지인이 네이버 카페 중고거래 피싱 사기를 당해서 함께 경찰서를 다녀왔습니다. 경찰관은 친절했지만 요즈음 이런 일이 더 비일비재하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길 해주었어요. 제가 느끼기에도 희망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같은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의 수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고 주가 조작, 전세 사기는 물론 사재기를 이용한 시세 교란 뉴스도 끊이지 않고 일간지에 등장하더군요. 기분을 지키려 뉴스를 멀리하려 해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나쁜 일들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비관에 빠져 법이 다 무슨 소용인지 싶다가도 법이 제대로 지켜져야 일말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에서 법의 궁극적인 목표는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위한 것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드릴 건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가 아닌,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Poetic Justice>입니다.

혹시 대표님께선 래퍼 켄드릭 라마와 드레이크의 디스전을 알고 계시나요? 음악팬들에겐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이벤트였지만 클래식을 즐겨 들으시는 대표님에겐 딴 세상 이야기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켄드릭과 드레이크는 흑인 음악의 선두주자로 대중성은 물론 음악성까지 인정받은 스타들입니다. 경과는 이렇습니다. 드레이크가 씬의 황제가 자신과 켄드릭이라고 하자 켄드릭이 너(드레이크)는 황제가 아니고 소아성애자에 범죄자이며 흑인 사회와 이미지에 빌붙어 좀먹는 쓰레기라고 한 것이지요. 굉장히 과격한 요약이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디스전은 켄드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저는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헌신과 그에 따르는 신뢰가 따라온 결과라고 생각했는데요. 디스곡들도 모두 훌륭하니 관심 있으시다면 한번쯤 들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런데 이 둘이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니었어요. 서로의 곡에 피쳐링도 해주고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서기도 하고 함께 보낸 시간으로 보아 친구였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 아이덴티티에 따라 살기, 다시 말해 시와 정의에 따라 살기, 그 부분에서 서로가 엇갈린 걸로 보여요. 정신없고 혼란한 와중에 저도 시와 정의를 다시 한번 새겨보려고 합니다. <Poetic Justice>(feat. Drake)에서 켄드릭의 벌스를 인용하며 이번 서신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very time I write these words they become a taboo

Making sure my punctuation curve

Every letter is true

Living my life in the margin and that metaphor was proof

I’m talking poetic justice, poetic justice

돌이켜 생각해보니, 몇십 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는 ‘텍스트 힙스터’였다. 우리 교실이 그 옆이라는 이유로 교실은 물론 도서실 청소를 맡았을 때는 집에 언제 가나 입만 나왔었다. 청소를 하는 혜택으로 대출증 없이 책을 자유롭게 빌려 갈 수 있다는 말에도 처음에는 솔깃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서실 서가 책들의 아우성에 마지못해 빌려가던 날부터 그 횟수는 점점 늘어났으며, 이후 탄력을 받아 중고등학교 때는 문고본을 사모아 책탑을 높이 쌓는 능력이 생겼다. 결국 그 탑 안에서 책을 계속 읽으며 오랜 시간 책을 만들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요즘 다시 ‘텍스트힙’이라는 말이 회자된다고 하던데, 이제라도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며, 원로 텍스트 힙스터로서 몇 가지 꿀팁을 알려주겠다.

• 외출시 책 한 권은 꼭 가지고 다니자. 햇빛 가리개로 그만이며, 먼지 묻은 벤치에 앉을 땐 방석으로도 유용하다.

• 동네에 단골 독립서점을 하나 만들자. 집에 미처 다 못 왔는데 소나기가 내릴 때나, 왠지 기분이 센치해질 때 피신처로 안성맞춤이다.

• ‘있어빌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꽤 괜찮은 노트와 펜을 장만하자. 책을 읽으며 마음을 움직였던 문장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놓으면, 후손들이 읽으며 두고두고 추앙할지도 모른다.

• 아이돌과 <미스터트롯>에만 열혈 팬들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의 책들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자. 이런 책읽기를 ‘전작주의 독서법’이라고도 한다지.

나중에 혹시 더 생각나면 다시 들려줄테니 그동안 책의 세계에서 즐겁게 유영하며 혹시 지나치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길!

한(漢)글자 아넥도트│교하도서관 출입문에서 만난 한자, '定'에 관하여

李甲洙

파주출판단지의 이웃인 교하는 交河다. 사귈 교, 물 하. 두 개의 물이 서로 교차하는 곳이란 뜻이다. 문명(文明)이 발생하기에 좋은 장소이겠다. 가끔 교하도서관에 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선 만나는 건 문(門)이다. 내 기억에 옛날의 문은 여닫이가 많았다. 활명수 한 병이라도 사러 약국에 가서 유리문을 연다. 그때 그 미닫이 문을 열 때의 호탕함을 아직도 나는 손 끝에 간직하고 있다.

요즘은 미닫이가 많다. 이런 문은 헷갈린다. 밀어야 하는가, 당겨야 하는가. 나의 경우 대부분 먼저 밀어본다. 가지는 것에 익숙한, 무엇이든 당겨 내 소유(所有)로 만들려는 본능에 익숙한 손으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동작이겠다. 이제 이곳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 얼른 저곳으로 나가겠다는 희망(希望)의 손짓이 은연중에 나온 것일까.

아무튼 들고남을 구별하지 않는 문을 통과하면 계단이다. 계단도 오르고 내림을 굳이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의 물건에 두 동작이 동시에 구현된다. 교하는 지방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서관 계단 끝 복도에는 경찰에서 배포한 <지명수배자> 안내 전단이 있다. 사기, 살인, 폭행, 절도 등등의 범인들이 사진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문 하나, 또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책들의 숲이다. 그곳에서 작은 독자가 되어 신착도서를 살핀다. 그리고 공자, 플라톤, 최제우, 셰익스피어를 지나 몇 권의 시집과 소설을 건성으로 건너뛰고,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존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해나무) 외 8권을 대출한 뒤 다시 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