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에서 시작하여 자네와 서신을 주고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입동을 지났네. 우리의 무심한 감각으로 입동이라면 어김없이 入冬이겠지. 저기 추운 겨울이 있고,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 기껏해야 그런 정도의 감각 아니겠나. 이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서, 자연과도 멀찍이 떨어진 자세와 태도를 유지하면서, 24절기를 자연의 출입문 정도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겠는가.
하지만 입동은 立冬. 자연에 사람의 인격처럼 하나의 격(格)을 부여하고 사람하고 나란히 서는 것으로 그 개념을 만들었네. 참으로 탁월한 감각이 아닐 수 없겠네. 이 세계의 근본과 세상의 존재에 대한 치밀한 검토 끝에 채택한 단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네.
예전에는 사계절의 구분이 명확했지만 날이 갈수록 극단만 무성해지는 느낌이 든다네. 춘하추동을 네 계절로 나누고 각 계절마다 3개월씩 균분하여 날씨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으나 이제 점점 봄과 가을은 그저 구색만 갖춰놓은 느낌. 제 직분에 충실한 자연의 냉폭한 괴한은 자잘한 세목에는 관심을 철회하고, 한탕을 노리는 노름꾼처럼 지독한 더위의 여름과 치열하게 추운 겨울만 우리에게 던져준다네. 견디는 것 말고 달리 다른 방법 없다고 짐짓 으름장을 놓으면서.
이처럼 중간지대 없이 물과 불이 바로 맞부딪히는 형국의 날씨, 이는 결국 우리가 아는 사시(四時)의 도래를 헷갈리게 한다네. 산에 가면 겨울에 피는 진달래, 여름에 피어난 벚꽃 등 이른바 불시화(不時花)가 지천에 깔렸네. 꽃들의 좌표가 시공간의 계단을 벗어나 제 알맞은 자리를 이탈하고 있다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유명한 법어(法語). 이 여섯 글자에서 각자의 근기에 맞게 무수히 많은 뜻을 캐낼 수 있겠지만 이 세상 만물은 제 경계를 지니며 홀로 고유하게 있다는 뜻도 담지하고 있겠지. 가령 나무 아래 들어 나무 그늘에 폭 휩싸였다가도 일어나 제 갈 길을 간다면 그림자끼리는 서로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평행하게 헤어진다네. 그런 것처럼 사실과 사물과 사람은 이 세계 내에 서로 평행하게 어울린 존재들.
다시 한번 적네. 입동은 立冬. 이중에서도 특히 입(立)이란 글자를 보면,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평행의 기운을 매우 잘 받든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드네. 사실 이 세상을 그려본다면, 나무가 자라는 것, 사람이 우뚝 서는 것이 도드라진다네. 이들은 서로 나란한 땅과 하늘을 이어주고 연결하는 듯하다네. 말하자면 대지와 하늘은 평행하고, 그 사이를 떠받치는 존재들도 또 서로 평행하고.
시간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네. 이제 곧 제 역할을 마무리하는 2024년. 이 서기는 한번 가면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일직선 위의 시간이네. 하지만 갑진년이라 표기하면 사뭇 풍경이 달라지네. 한 해를 감당하느라 너덜너덜해진 갑진은 새로 추슬린 뒤 60년 후에 다시 새롭게 오지. 올해 환갑을 맞은 이도 노력 여하에 따라 다시 또 다음 갑진년에 몸을 담글 수가 있는 법이라네. 이처럼 시간의 끝을 한번 구부리면 뫼비우스이 띠처럼 전혀 다른 시간의 터널로 우리는 들어가네. 이 또한 평행하는 우주, 평행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평행이라는 말은 사각형의 한 특수한 형태라고 수학시간에 배웠지만 이 세계의 밑바탕을 설계하는 묘한 성질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네. 각박한 정치와 돼먹지 못한 사회가 가르쳐 준 교양의 하나라고 하기엔 좀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네. 마무리하겠네. 막막한 날들이 안팎으로 계속되고 있네. 자네가 지난 편지에서 언급했던 “짜증”과 “희망”도 어쩌면 나란히 평행하면서 자네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 마음을 잘 다스리고 슬기롭게 이기고 이어나가기를 비네, 자네와 자네의 평행한 나날들을 위해!
추신. 이 글이 좀 미진한 듯하여 24절기에 관한 옛 메모를 들추다가 재미난 것 하나를 발견했기에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네. 따져보니 지금에서 정확히 8년 전에 쓴 글. 물리학에서 말하는 평행 우주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밑바탕에 우리 사는 세상도 참으로 평행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네.
“입동 근처. 서리 내린다는 상강 지나고 며칠 후, 심학산에 올랐다. 무기력한 나날 속에서 모처럼의 산행이다. 요즘 날씨는 저녁을 서둔다. 해도 일찍 진다. 싸늘한 기운이 공중에 잔뜩 퍼져 있다. 5시 근방인데도 벌써 어둑해진다. 도시에서 벗어난 한갓진 곳이니 반사되는 불빛이 없어 더욱 그럴 것이다. 배밭에서 주인이 마지막 수확을 하고 있다. 아직도 나무에 달려 있는 배가 몹시 추워 보였다. 미국의 대통령 뽑는 선거에 사람들이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사람들이 모두 핸드폰에 머리를 박고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미국발 소식에 놀라고 있다. 이미 신뢰를 다 까먹은 코리아 대통령, 럭비공 같은 아메리카 대통령, 평행인가. 언제부터 우리가 이리도 좁고 가까운 세계에 살게 되었나. 심학산 정상에서 트럼프가 승리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머리 들어 보니 지는 해와 떠오른 달이 한 하늘에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어둠이 세상을 꽉 조이는 기분이다. 이 정상에 무작정 머무를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던 하산해야 한다. 어둠에 몸을 맡기고 세상에 마음을 섞어야 한다. 2016. 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