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꿍이의 말

역사는 이야기이다. 소설도 이야기이고 영화도 이야기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역사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들의 연결이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사실로 확인된 것들을 연결해 만든 이야기이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처럼 역사에도 등장인물들과 화자가 있다. 누가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역사는 힘 있는 자들이 만든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객관적인 역사, 중립적인 역사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1901년부터 2021년까지의 한국과 세계 근현대 역사를 담은 연표이다. 한 해 동안 벌어진 일들에 허락된 지면은 단 두 쪽이다. 이 안에 어떤 사건을 담을지 담지 않을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모든 선택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하물며 ‘역사’라는 거대한 주제 앞에서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를 선택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이다. 내가 연표에 생략한 어떤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내가 연표에 담은 그 어떤 사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쓸모 있는 책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단순한 사실들의 나열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간략하게나마 설명이나 해석을 달았고, 시각 자료들도 되도록 시원시원하게 쓰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날짜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사실들의 연결이 아니라 오류들의 연결이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이 누군가의 쓸모 있는 공구서가 되어 좋은 이야기, 좋은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한 후배에게 이 책의 교정지를 보여주며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한국의 역대 대통령을 모은 인포그래픽 속 사진들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어째 이렇게 제대로 된 사람이 적지….”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는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 어쩌면 역사가 한순간에 뒤바뀔지도 모를 사건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명색이 국회의원이란 자가 “나 욕 많이 먹었어. 그런데… 내일, 모레, 1년 후에 국민은 다 달라져.”라는 말을 했다. 그랬다. 답은 망각에 있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이번 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전부 다시 자신을 “찍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바람이 생겼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벌인 행위들이 ‘망각’되지 않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그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힘 있는 자들의 믿음이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임이 이제는 완벽하게 증명되었으면 좋겠다.  

📘이달의 단편 | 「밝아지기 전에」

『노랑무늬영원』 | 한강 | 문학과지성사

🤔꿍꿍이

"여러 날 추위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추워지면서, 서울의 거리는 차가운 지옥처럼 점점 더러워진다. 보도에 쌓인 눈은 녹지 않고, 그 위로 그을음 같은 때와 쓰레기와 가래침들이 겹겹이 얼어붙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발을 내리 디디며 좁은 보폭으로 걸어야 한다."

- 한강, 『노랑무늬영원』, 「밝아지기 전에」 중에서 

올해 마지막 단편 소개는 눈 내린 서울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10월 10일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된 「밝아지기 전에」인데요. 날이 갈수록 춥고 어지러워지는 서울의 거리와 혼란스러운 시국, 격화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그럼에도 상상해 볼 수 있는 희망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한겨울이에요. 소설가인 '나'는 직장동료였던 '은희 언니'를 만나러 가는 여행을 얼마 앞두고 항공권을 환불합니다. 은희 언니의 갑작스러운 비보 때문인데요. '나'는 예상치 못했던 부고를 듣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는 '은희 언니'가 전해준 이야기에서 온 것입니다. 인도 여행이 어땠냐는 '나'의 물음에 '은희 언니'는 딱히 다른 건 없었다며,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죽음이라고,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운다고 말합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이후 '나'는 어딜 가나 출몰하는 다양한 심장의 이미지를 마주합니다. 지인의 전시회에서 "심장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저것들"을 보고, 그에게 "그렇게 조그맣게, 그렇게 아프게, 나의 심장, 이라고" 0.3밀리 샤프펜슬로 적은 심장을 전해 들어요. 그러나 한국의 화장장에선 삽시간에 시체가 전소되어 뼈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건 은희 언니의 장례식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곳에 심장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나' 본인도 질병이 있어 죽음을 가까이 감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따금 풍경에서, '나'의 자녀인 '은이'에게서 아름다움과 생명을 바라보곤 합니다. 죽음에 예민하기 때문에 끝끝내 피어나는 생명에도 민감한 . 그래서 소설은 '나'가 "서늘한 문장" 앞에서, 파르스름한 사위 속에서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쓰며 끝을 맺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랑무늬영원』에는 상처 입은 부위를 치료하려다 오히려 부상당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회복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회복은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인지, 다시 상처 입고 다칠 텐데 그래도 괜찮은지, 작가는 묻는 것 같아요. 심장의 다양한 형태처럼 각자의 고통과 회복도 제각각일 거예요.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지글지글 타고 있는 심장을, 생명을 함께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새해가 밝기 전에 우리 모두 회복되어가는 연말이 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한(漢)글자 아넥도트│'바깥 外'에 관하여

李甲洙

‘바깥’에 대한 국어사전의 풀이는 좀 싱겁다. ‘명사, 밖이 되는 곳’이라는 뜻. 하나 더 붙인다. ‘사방, 상하를 덮거나 가리지 아니한 곳’. 말하자면 어느 경계를 상정하고 그 경계 너머를 이르는 말이겠다. 저 가믈가믈한 하늘에도 경계가 있지만 이내 가슴에도 경계는 있겠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는 듯한 바깥에 대한 개념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문 열거나, 창 열면 있는 그곳도 영락없이 바깥이긴 하다. 아침에 일하러 나가려 현관 열었을 때 들이닥치는 그곳, 세상, 햇빛도 가장 첨예한 바깥이다. 이렇고 이런 바깥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상투적인 바깥.

가령 애인을 만나러 약속 장소인 익숙한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이제까지 안온하기만 하던, 커피향 진하게 밴, 애인이 방긋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공간이 문득 낯설어진다. 이곳은 아늑한 안이 아니라 세상의 대롱대롱 매달린 바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마를 서늘하게 때리기도 하는 것.

이럴 때 우리의 생각은 성큼 자라고, 문득 이 세상이 늘 눈에 보이는 대로 빤하거나 생각 안에서 여일하게 허우적거리는 대로 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발 하나는 그곳을 딛는다는 느낌도 갖는다.

바깥. 이는 나에게 무언가 좋은 것이 숨어 있는 곳, 아니 그럴듯한 것을 감춰두는 곳이기도 했다. 엄마 손잡고 외가(外家) 가는 길은 얼마나 황홀한 순간이었던가.

🌏한국사 특집 | 역사가 된 어떤 일기

🦆더기

"일기를 쓰는 사람이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한 사람의 역사는 한 시대의 역사가 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하루를 남겼을 뿐인데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되기도 한다. 일기를 쓸 때는 알지 못한다. 내가 남긴 기록이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이해하는 소중한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윤성희, 『편지로 글쓰기』, 94쪽.

『편지로 글쓰기』에는 역사로 남은 일기 몇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중 1980년 광주여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전남도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남긴 일기가 있는데요. 5․ 18 현장이 생생히 담긴 이 기록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당시 광주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을 통해 유튜브, SNS에 모든 상황이 실시간 전국적으로 알려진다지만, 이런 것이 없던 시절 광주는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도시였으니까요.

해서 쓰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다짐합니다. 거창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라도, 너무나 평범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날일지라도요. 그간 비공개 블로그에 남겼는데, 전기가 끊기고 통신이 두절되는 아찔한 상황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다시 일기장을 펼쳐야겠어요. (연초마다 새 마음으로 사놓은 다이어리며 여기저기서 사은품으로 받은 무선노트가 자기 좀 써달라며 굴러다니네요.) 이게 훗날 역사의 한 장면을 증언하는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또박또박 써야겠습니다.

🗓️ 절기-록 (17) │ 어느덧 동지 그리고 팥죽

李甲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