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꿍이의 말

🗓️ 절기-록 (20) │ 입춘(立春)

꿍꿍이

설연휴 잘 보내셨나요 대표님. 회사에서 매일 보는 처지에 이렇게 여쭙기도 멋쩍지만 괜히 안부 인사 드려봅니다. 작년 봄에 시작한 저희 서신교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정다운 말을 하나라도 더 남겨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번 절기인 입춘(立春)을 보내고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고 나면 우수(雨水)와 경칩(驚蟄)까지 24절기를 모두 톺아보게 됩니다. 첫 서신에 '우수'가 당도하면 풀어놓을 이야기가 있다 하셨을 때만 해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버릴지, 한 해를 오롯이 담는 프로젝트가 무사히 마무리될런지 의구심이 있었는데요. 공교롭게도 대표님의 마지막 서신인 '우수'를 바로 앞두고 있네요. 저번엔 겨울 추위를 생각하며 홀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셨다지요. 몸은 낮으나 정신은 높이 걸어두고 싶으시다는 말씀에 밤마다 이동하는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별똥별을 기다리며 여러 소원을 빌기도 했는데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최근에 저는 《지. :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라는 만화를 다 보곤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세시대 사람들에게 하늘은 닿을 수 없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지상은 저급하고 죄 많은 존재이 거쳐가는 둥우리였다고 합니다.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현세의 삶은 천국이라는 내세로 가기 위해 감내해야 할 찌꺼기였고요. 그런 시대에 천문을 탐구하는 행위는 신의 섭리를 받드는 수도이자, 기존 섭리와 신앙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는 그 물음표를 품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최초 발행일: 1543년)를 집필하기 이전인 15세기 초 유럽을 배경으로 합니다.

대표님은 달을 올려다보며 동경하고 단련하는 마음을 느끼셨다지요. 무엇인가를 올려다볼 때 드는 감각과 감상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기도 합니다. 《지.》의 인물 중 하나는 밤 하늘을 감히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그건 인물이 고개를 들고 별을 볼 때마다 자신의 더러움과 추악함을 내려다보는 신의 눈을 마주치기 때문이며, 해당 장면은 세계관과 신앙이 강제하는 중력이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눈으로 표현됩니다.

모두가 모두를 바라보는 현대 사회도 어쩌면 그와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볼 것도 들을 것도 많은 매 순간,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자극을 따라 좇습니다. 직업 때문인지 현시대 이러한 상황에 출판이란 무엇인지 계속 자문해보곤합니다. 모든 비관과 낙관을 거쳐보아도 이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출판과 인쇄술이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를 다룬 《지.》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 하지만 우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 ‘지금’을 먼 곳으로

교회의 탄압에 맞서 저항단체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를 출판하려는 대목을 찍어 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부터 출판 활동을 개시한다.”로 마무리되는 저 장면이 심금을 울렸습니다만, 이제 와서 출판이라는 것이 마냥 그렇게만 낭만적이진 않다는 것을 대표님이나 저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요. 최근 베스트셀러 목록만 봐도 『STOP THE STEEL 대법원의 부정선거 은폐기록』이란 책이 예약 구매만으로 온라인 서점 3사의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훔치지 말라는 것인지 의문을 넘어 당혹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제목으로 짚어보건대 총선결과 그리고 탄핵정국까지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고착시켜, 미래로 도달시"키려는 의지와 실천의 표명이었겠지요.

여기서 저는 음력으로 설을 지나고서야 간지가 시작되니 "2025년과 함께 을사년 운운하는 건, 을사(乙巳)를 미리 가불하는 셈"이라신 대표님의 말을 떠올립니다. 가불(假拂)을 한자로 풀어보면 거짓으로 떨치다, 가상으로 치르다 라는 뜻이 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완성시킨 천동설에도 '주전원'과 '이심'이라는 '가불'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지동설을 당연히 여기고 있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초기 지동설 또한 불안정하여 '주전원'들이 잔존했습니다. 지동설의 남겨진 기록은 기원전 4세기에 태어난 '아리스타코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대 우주론이 이처럼 많은 연구와 목숨을 거듭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 생각해보면, 하물며 출판이란 무엇인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외 없이 우리 사회도 다종다양한 주전원들이 우리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심사에 정신이 아득해지려 하면 달을 비롯한 천구를 올려다보는 자세로 마음을 단련해야겠지요. 입춘(立春)을 맞아 추위를 슬기롭게 견디고 나가자는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겨울은 곧 지나갈 테니 이제는 봄을 생각하겠습니다.

李甲洙

1. <10의 제곱수>라는 책이 있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상대적 크기를 보여주는 놀라운 책이다. 런던의 어느 공원으로 피크닉 나온 중년의 사내. 독서하다가 책을 펼친 채 잠깐 잠이 들었다. 드론으로 찍듯 그 일상의 광경을 기준으로 삼아, 10배씩 확대한다. 몇 번의 도약으로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 되고, 우주의 아득한 저편으로 간다. 영화 <콘택트>에서 조디 포스터가 하늘을 손가락을 튕기자, 화답하듯 금방 공중이 꿀렁꿀렁거리는 곳이 이와 같을까.

2. 이번에는 똑같은 방식으로 10배씩 축소한다. 손등에 나부끼는 솜털이 낭떠러지에 우뚝한 낙락장송 같더니, 숨구멍이 왕복 4차선 터널처럼 벌어진다. 이윽고 몇 번 지나지 않아 세포, 소립자. 전자, 쿼크...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미시세계의 한 끝. 분명히 그곳은 손바닥 안의 세계다. 놀라워라, 확대한 우주 바깥의 끝과 축소한 몸 안의 끝이 쌍둥이처럼 서로 꼭 닮지 않겠는가.

3. 사실 냉정히 관찰해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이 세계에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를 따지고 따지고 또 따져본다. 모든 사물이 자기만의 특별함을 유지하려면 부피를 가져야 한다.꽃이 열매로 맺히는 것처럼. 그런 개체 속으로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면 결국 텅, 빈 허공 안에 확률적으로 겨우 띄엄띄엄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말고 달리 다른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는 당연한 궁리.

4. 그렇게 아득한 우주의 한 곳을 확 잡아들인 곳이 바로 내 몸 안이라는 게 아닌가. 이는 물리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인간의 몸이 우주를 떠도는 먼지들의 집적(集積)이라는 말은 괜한 수사(修辭)에 불과한 게 아닌 것이다. 나의 끝과 우주 끝은 나도 모르는 내 안에서 이렇게 실제로 접속하는 것, 이는 정밀한 과학이다.

5.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저 우주만 하더라도 이제껏 일생 굴리고 벼린 몸을 뗏목처럼 버리고 지구를 떠날 때, 어차피 징검다리처럼 지나쳐 가야할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미구에 섭렵할 탐험과 여행의 목적지라 해도 무방하다.

6. 지붕 아래 살면서 방바닥과 대칭되는 저 면적을 천장(天障)이라 명명(命名)한 건 탁월한 조어(造語)다. 비바람 막아주는 집에도 하늘을 끌여들었으니 멍청히 누워 시간이나 죽일 때에도 공중의 기미를 알아차리라는 것. 지붕 너머를 이윽히 헤아리라는 것. (입안에도 갯벌처럼 우툴두툴 입천장이 있다!)

7. 그렇게 방에서 멍 때리며 채널을 돌리다가 내 일천한 교양과 상식을 보충해주는 방송이라서 종종 챙겨보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만났다.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 이번 주제가 무척 요란했다. “해저 2만리! 깊은 바닷속은 왜 전쟁터가 되었나?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 심해”  

8. 이날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획득한 정보들은 대강 다음과 같다. “우주보다 미스터리한 곳, 심해/심해는 신비한 생물들이 가득한 곳/심해는 지구 면적의 65%를 차지/전 세계가 심해를 두고 총성 없는 전쟁/바닷 속 노다지 심해 전쟁/해저 탐사 시초 영국, 심해 정찰 성공, 주요국들 가세/심해는 수심 200m 이하의 깊은 바다/햇빛이 전혀 들지 않고 산소도 매우 희박/극강의 추위와 엄청난 수압으로 생명체가 살기엔 극악한 환경/지구에서 38만km 떨어진 달에 간 사람=12명, 10km 심해에 간 사람=5명/부력 때문에 심해는 우주의 무중력과 유사한 환경”

9. 무슨 까닭인지 살아 있는 동안 저 별과 달, 저 산과 강을 발로 혹은 눈으로 짚으면 이 세상 다 알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심해라니. 그곳은 ‘우주의 끝’과 몸의 끝‘과는 전혀 별개의 극지(極地)라는 것 아닌가. 문득 깊은 바다, 심해가 어두운 발등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궁리에서 만든 책, <심해>도 덩달아 떠올랐다.

10. 해마다 신년 초에는 올해 개봉작에 대한 소개와 기대를 다룬 뉴스가 뜬다. 세계적 명장의 반열에 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잇는 차기작이 단연 화제다. 이와 관련한 뉴스 하나. “봉준호 감독이 올해 <미키 17>에 이어 첫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작가인 클레르 누비앙의 책 「심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으며, 깊은 바닷속에 사는 해양생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제작비는 약 700억 원으로,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이 될 전망이다.”(출처: 씨네플레이)

11. 시대의 급소를 정확하게 찌르는 봉 감독의 영화에 대해 전세계는 정확하게 반응한다.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 누가 굳이 안방에서 걸어나와 극장까지 갈까, 내심 영화의 미래를 어둡게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으로 조립되는 스크린을 보면서 인간의 상상력은 극대화된다. 자신은 누구인가, 좌표를 성찰하기도 한다. 이러니 빛이 있는 한 영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2. 심해, 빛은 없고 엄청난 수압이 팽배한 곳. 신비한 기괴한 심해어가 살아가는 곳. 그러니 그곳은 얼마나 많은 상상이 숨쉬고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봉 감독의 신선한 터치로 살아날 가깝고도 먼나먼 <심해>가 벌써 들썩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漢)글자 아넥도트│'무거울 重', '거듭할 重'에 대하여

李甲洙

저는 자그마한 책이 좋습니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그 내공이 서서히 느껴지는 책이면 더욱 좋고요. 유병욱 작가의 『생각의 기쁨』이 왜 2월이면 떠오르나 봤더니, 일상에서 영감을 얻기에 괜찮기도 하지만, 갓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들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물어오는 청년들에게 여러 번 선물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에도 가끔 책장에서 꺼내 읽으며 새롭게 밑줄을 치고 있어요. 이분의 살짝 내성적인 글톤이 좋아서 『평소의 발견』과 『없던 오늘』도 장만했지요. 참, 얼마 전 나온 『인생의 해상도』도 곧 읽어봐야겠습니다.

"어떤 책장은 얼핏 보면 왜소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지곤 합니다. 책의 가짓수는 적지만 다른 곳에는 없는 책들(말하자면 희귀본들)이 꽂혀 있기 때문이죠.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 경험과 지식, 자신의 인생에서 캐낸 보석 같은 지혜로 가득한 책장입니다."

--<생각의 기쁨> 167쪽

과연 저는 어떤 모습의 책장을 갖추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혹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책장이면 안 되는데…^^;; 다양한 인생 공부를 하면서 더 겸손하고 진중한 사람의 모습을 담은 책장이 되어서 3월에도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