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꿍이의 말

🗓️ 절기-록 (21) │ <미키>의 눈으로 본 열일곱 번째의 우수(雨水)

李甲洙

겨울 한파 속에서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화제네. 아직 개봉도 안 된 영화를 두고 말하기는 좀 그렇네만, 공개된 대강의 줄거리에 기대어 말해보네. 우리는 나무나 꽃은 아니지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로봇도 아니지. 그렇다고 그게 크게 우쭐할 일도 아니라네. 그저 돌이나, 소나, 공중의 먼지처럼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 두 발바닥만큼의 면적으로 지구 표면을 점유하고, 자신만의 무게와 부피로 공중을 점령할 뿐.

영화 제목인 <미키 17>. 여기서 ‘미키’는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근미래를 살아가는—살아간다는 말이 적당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주인공인 로봇의 이름이고, ‘17’은 그가 이제 17번이나 죽고 다시 살아나는 횟수를 말한다고 하네. 문서를 복사하듯, 생명을 프린트하는 것, 다시 말해 죽음과 태어남을 되풀이하는 것이 어디 로봇인 미키만의 운명일까.

냉정히 관찰하면 생사의 윤회를 거듭해야 한다는 인간의 운명도 이와 비슷한 것. 윤회라고? 이 멀쩡한 공간의 어딘가에 과거와 미래가 숨어 있을 수 있다고?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리 쉽게 아니다, 라고 치부할 건 또한 아니라네. 물리학자들의 실험과 통찰에 따르면 빛은 휘어지고, 공간은 첩첩이 중첩되고, 평행하는 우주 속에 쌍둥이 우주도 있다 하잖은가.

이런 과학적(!) 사실들 앞에서 문득 나의 눈과 두뇌는 초라해지네. 자연법칙을 담은 간결한 공식과 아름다운 수학 앞에서 늘 좌절하지만 그래도 희미한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네. 가령 저 우주의 끝과 몸속의 끝은 아득히 같아진다는 것. 지금 이 시각 내가 짊어지고 있는 나의 등이 무엇을 보고, 어디와 접촉하는 줄을 나는 전혀 짐작조차 못한다는 것. 그렇지만 이런 명확한 사실에서 나의 여지(餘地)는 생겨나도다!

사람의 일생이 마감되는 현상인 죽음이 벌어지면, 우리는 초상났다고 하네. 초상이라고 할 때의 ‘초’는 주검이 풀들의 고향인 지하로 간다고 ‘풀 草’도 아니고, 이까짓 죽음 따위 가볍게 여긴다고 ‘넘을 超’도 아니고, 저승사자가 부른다는 ‘부를 招’도 아니네.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인 ‘초 秒’도 아니라네. 참으로 뜻밖에도 그것은 처음 初. 즉 初喪이라고 표기하네.

이는 천사가 저곳에서 모든 기억을 잊고 모른 척, 잘 살라며 눌렀다는 코밑의 인중(人中)을 달고 태어난 이래 이제 겨우 이승에서 처음으로 한번 죽어보는 것. 그러니 앞으로 처절한 수행 끝에 해탈! 다시 말해 인간의 탈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저 <미키>처럼 끝없는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인간이나 로봇이나 다 같은 운명이란 것을 저 ‘初喪’이란 말에 은밀하게 숨겨놓은 게 아닐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의 일생, 쉬운 일은 아니네. 시공간의 표면에 한순간만 드러나지만 그게 아쉬워 역사를 기록하고, 일기를 쓰고, 신문을 발행하고, 출판사는 책을 만드네. 그리고 또 우리는 한 일생을 겪으면서 매듭처럼 반지를 만드네. 돌반지, 약혼반지, 결혼반지 그리고 황혼의 반지. 그렇게 잘록잘록 한 무더기의 보따리처럼 세상의 시간은 한 매듭을 엮어 나가네.

지금은 안팎으로 매우 추운 계절. 꽃샘추위라고도 하는 공중의 찬 기운에 우리 사회를 휘감는 정치적 온도도 싸늘하기 그지없네. 이로 인한 체감 온도는 가히 기록적이라 하겠네. 깨끗한 추위라면 오히려 봄의 발아를 위한 필수 필요조건이겠지만, 작금의 사태는 정상과 합리의 범위를 벗어난 지극한 몰상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네.

사람의 사회가 복잡다단과 오리무중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해도, 사시는 명확해서 사계절은 분명하네. 뜻밖의 질서가 잠시 헝클어져도 잠시 시간이 걸릴 뿐 모든 건 제자리를 찾을 걸세. 지금 우리를 감싸고 있는 건 절기는 우수(雨水). 그야말로 비와 물의 시간이네.

지난주에는 평창의 백적산으로 모처럼 심설 산행을 다녀왔다네. 강원도의 눈이라고 해도 그냥 한숨에도 후, 날아가는 눈. 입김에도 훅, 흩어지는 눈발인 줄 알았는데, 정말 압도적인 눈의 실체를 제대로 목격한 하루였지. 물의 행성인 지구에서 어쩌면 모든 사물은 물의 변용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네. 단풍도 잠시 물이 멈춘 것, 바위를 짜도 물이 나오고, 인체도 70% 이상이 물이라고 하잖은가. 그러니 비가 잠시 동작그만!한 상태의 눈앞에서 좋은 공부를 했지.

자네하고 일 년의 주기를 24절기에 맞춰 일상생활과 밀착하며 글을 나눈 지가 벌써 일 년이 되었네. 추운 시절에 시작하였다가 명확하게 다시 추운 시절이 찾아왔으니 한 바퀴의 매듭을 지은 셈이군. ‘우주의 보배’라는 칭송을 듣는 책인 <논어>를 처음 접할 때, 학이(學而)부터 요왈(堯曰)까지 스무 개의 편명을 입 안에 넣고 중얼거리고 붓으로 쓰기도 했네. 그땐 스무 개의 낯선 마을을 새로 내 입안에 건설하는 기분이었지.

절기록을 시작하면서도 일상과 일기를 꽉 맞물리게 밀착시키자면서 24절기 또한 우선 그 명칭부터 뚝딱뚝딱 내 근처에 짓기 시작했지. 춘분부터 시작해서, 청명, 곡우를 거쳐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지나 마침내 입춘까지.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서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고, 또한 올해 들어 특히 심한 기후변화로 인해 더욱 엇나간 날씨의 변덕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네. 그리고 이제 이제 우수와 경칩만 남겨두었네.

우수(雨水). 비와 물. 아무리 폭설이 와도 결국 눈물로 녹아 사람의 마을을 촉촉이 적신 뒤,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더 넓은 세상을 찾아가네. 가만 관찰해보면 비는 수직으로 내리고 물은 옆으로 흐르네.

봉준호 감독의 또다른 영화,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나? 앞으로만 질주하는 기차, 꼬리칸에서 앞칸으로 진출하려던 사람들. 결국 폭주하던 설국열차는 궤도를 이탈하고 사람들도 모두 목숨의 줄을 놓아버리지.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는 새싹같이 파릇파릇한 아이들 몇 명. 그간 미친 듯 <앞으로>, <앞칸>으로만 향하던 기차의 <옆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나와서 눈밭을 헤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아가도다!

눈에서 비, 비에서 물로의 직각의 전환은 물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온갖 사물을 빚고 살려내는 과정이기도 한 것. 어제 내린 눈에 마음을 얹고, 물의 마음을 훔치며, 눈 녹은 물을 타고 세상으로 떠나는 것으로 <우수>의 뜻을 헤아릴까 하네. 새롭게 또 공부하세.

살아가는 데 부족한 것 없이, 서로 간의 갈등도 없고 모두가 행복을 나누는 세상, 그런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들 한 번쯤은 그런 이상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을 텐데요. SF 소설가 어슐러 르 귄 또한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사랑과 기쁨, 즐거움이 가득한 행복의 도시, '오멜라스'를 그려 보입니다.

‘오멜라스’라는 이름은 작가가 도로 표지판에서 빌려온 단어로, ‘살렘(오리건) 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라 합니다. 살렘은 셸로모, 살람, 평화와 같은 뜻이며, 멜라스는 오 멜라스, 오멜라스, 옴엘라스—'아아, 인간이여'라는 뜻의 프랑스어와 연관된다고 르 귄은 밝히고 있어요. '오멜라스'를 묘사하는 화자는 사회를 자세하게 묘사하며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달아둡니다. 

군주제나 노예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멜라스에는 주식 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도 없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데 오멜라스 주민들은 멍청하지 않았고 즐거운 양치기도 아니었으며 고결한 야만인도 맥 빠진 몽상가도 아니었다. 오멜라스 주민들의 삶은 우리들의 삶보다 절대로 더 단순하지 않았다.

-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중에서

신화나 동화를 구술하는 사람처럼 영탄법을 쏟아내는 화자는, 흔히 낭만주의자들이 예찬하는 목가적인 풍경이 아닌 복잡하게 구성된 이상향이라는 점까지도 암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긴장감과 그 아래 도사린 불안은 도시의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에 위치한 지하실 방에 이르며 전면화됩니다.

그 지하실은 "가로로 두 걸음, 세로로 세 걸음 정도" 크기에 청소도구나 연장을 넣어두는 창고로,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먹고 자며 나가게 해달라고 빌어보지만 아무도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이다. 그 아이에게 친절한 말 한 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은 그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그들과 자애로움과 즐거움은 시에 걸린 계약/주술에, 한 아이의 비참함에 비롯한다고 화자는 이야기합니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공동체 내 갈등을 해결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장치로 속죄양, 희생양 이론을 제시했는데요. '희생양'은 우리 사회에 비극과 참사, 그리고 유명인의 불행한 죽음에 따라붙곤 하는 낯익은 수사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반복되는 의문—꼭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공동체가 안정되고 정화될 수 있는 건지, 그래서 누군가를 비난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는 건지, 오히려 문제는 그대로 남겨두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유지하는 편리한 방법이 아닌지—도 마찬가지로 뒤따릅니다. 

하지만 르 귄은 소설에서 더 이해하기 힘든 일, 아직 해명 불가하나 더 열려있는 일, 다시 말해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일을 상상해 봅니다. 아마 제목으로 예상할 수 있을 텐데요. 바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하실의 아이를 보곤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둠에 잠겨 있으며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다고 해요. 저도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어떤 희망이 있는 곳으로 향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메이우드

“나는 창조자이자 창조물입니다. 나의 예술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에곤 실레

저는 꽃과 식물 등 일상의 소재들로 자신을 표현하는 오브제 작업(스튜디오 메이우드)을 이어오면서 제 스스로를 ‘이웃집 아티스트’라고 자주 부릅니다. 감상자와 생산자를 겸하는 이 과정이 어떤 특정한 이들에게만 가능한 게 아님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의 주인공은 클림트도 아니고 실레도 아니었습니다. 32년이라는 나이차가 있지만 이들이 연결되어 멘토와 멘티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주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빈의 미술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펼치고 싶었던 ‘빈 분리파’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전시는 클림트와 실레 사이를 연결하는, 클로만 모저, 요제프 호츠만 등 분리파 예술가들의 초상들과 작품들, 그리고 그 분리파에서도 새롭게 독립한 자유분방한 예술가들로 이어집니다.  

한(漢)글자 아넥도트│‘검을 玄’에 대하여

李甲洙

오늘 하루를 시작한 과정을 되짚어보면 이렇다. 깜깜한 밤을 지나 새벽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한숨 더 잤다. 밤에 다시 푹 파묻힌 셈이다. 이윽고 알람의 독촉을 받고서야 일어났다. 비로소 어둠의 장막을 걷어차고 눈을 떤 뒤 직립(直立)했다. 달그락달그락 밥그릇을 비우고 옷을 걸치고 거울 앞에서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쓰다듬은 뒤 검은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섰다.

현관은 玄關으로 쓴다. 왜 검을 현을 쓸까. 우리는 대부분 현을 천자문(千字文)의 첫 대목인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에서 만난다. 고려시대 어느 영특한 아이는 천자문을 배우다가 이런 질문을 던져 스승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저는 천자문을 안 읽겠습니다. 왜? 땅이 똥처럼 누런 건 그런대로 알겠는데 저 푸른 하늘이 왜 검다고 하는 겁니까. 저는 이런 거짓말을 도저히 받아들 수 없습니다.

천자문에서 玄을 ‘검을 현’으로 훈을 달면서 그저 검다라고만 이해하기가 쉽다. 여기에서 하늘을 형용하는 검다, 라는 말의 속뜻은 실은 가물가물하다, 라는 뜻에 가깝다고 한다. 아득히 멀고 깊어서 가물가물한(또는 가믈가믈한) 상태를 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멀고 깊으면 검을 수밖에 없는 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