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 |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를 재출간하는 소감
🎬︎이달의 영화 | <그림자 군단>
🪁4월의 추천도서 | 세상을 편집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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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꿍이의 말
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4월 5일 식목일을 앞두고 레터를 보내려고 했는데요.
어쩌다 탄핵선고 기념 레터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탄핵심판 청구인 대표 정청래 국회위원이 인용한 김영삼 前대통령의 명언입니다.
마찬가지로 봄날에 새싹이 우수수 자라나는 것도 막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해가 뜨고 싹이 튼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언제나 기뻐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행운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기도 합니다.
잠시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준비한 콘텐츠 소개드릴게요. 근 한 달간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던 곳이죠.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재출간 소감을 이갑수 대표가 준비했습니다. "불의에 맞서는 칼날"이란 부제를 강조한 계엄 정국관련 이야기라 매 문단 긴장감이 넘칩니다. 저는 <이달의 영화>란 코너로 최근 극장에서 관람한 영화를 소개했어요. 예속과 저항에 대한 누아르! 많은 분들이 관심가져주셨으면 합니다. <한글자 아넥도트>에선 '다스릴 治' 다스림과 멸치(!)에 대한 통찰이 펼쳐집니다. <이달의 책 추천>에서 비블리오마미는 작가가 된 역자들의 책들을 소개합니다.
그럼 이만 궁리함 제26통의 소개를 마칩니다.
짧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주말, 넉넉히 즐기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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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를 재출간하는 소감
李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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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은 늘 문제적이다. 그것만 생각하고 싶은데, 온갖 잡념이 떼지어 보란 듯 출몰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한 생각만에 집중하느라 오로지 화두(話頭) 하나를 붙들고 씨름한다. 마찬가지다. 그것만 보고 싶은데, 그것만 보이지 않는다. 눈앞은 복잡한 와중이다.
눈앞은 늘 그대로인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천만에, 그럴 리가 없다. 냉정히 관찰해보면, 눈앞은 신기하게도 엄청 변하고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척, 잠자코 있다. 지금 자신의 눈앞을 바라보는 자에게 안심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그대로 믿었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저 풍경, 저기 눈앞의 나무 밑으로 언제 끌려 들어갈 지 모른다. 그랬다간 누군가의 묘비명처럼, 뒤늦게 무덤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며 땅이나 치고 있지 않을까.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지금도 눈앞은 안간힘을 다해 아무 일 없는 듯, 그런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책은 아주 느린 매체다. 신문이나 방송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순간적으로 반응한다면 출판은 천천히 오래 깊고 넓게 대응한다. 궁리출판의 출간 모토 중의 하나는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되, 사람들의 관심이 모자란 곳을 다루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출판의 볕을 쬐지 못한 곳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병원, 군대, 학교, 어린이, 노인 등등.
아마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을 무렵이었다. 그간 내팽개쳐둔 헌법을 새롭게 들여다 보자는 기획안을 마련했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전문을 비롯해 법 조항의 주요 단어를 하나하나 쉽게 풀어보고 개념 정리를 해보는 것. 가령 우리는 ‘우리’라는 말도 얼마나 대충, 대강, 어렴풋이 알고 있는가. 국민, 민주, 공화국, 자유, 권력....등등의 너무나 흔한 말들을 새롭게 주권자의 입장에서 환기하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헌법 전문은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줄줄 외워야 하지 않을까. ‘헌법전문 외우기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대강 이런 요지의 기획안을 만들고, 가능한 필자를 압축한 뒤, 메일을 보냈다. 수신 확인을 하고 혹시나 연락을 기다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궁리의 기획안은 보기좋게 쓰레기통으로 갔다. 다만, 그때 접촉하려고 했던 어느 분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자주 접할 수 있고, 또 어느 분은 내 안목이 짧았다는 게 여실히 증명되었다는 것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많이 전진하였다.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세계적인 성취를 이루었고, 무엇보다도 헌법 제1조 1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원칙은 공리처럼 확립되었다. 군은 확실히 문민이 통제하게 되었고, 계엄은 박제되어 녹슨 기억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계엄이라니!
그동안 우리가 목도한 대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저질러졌고, 친위쿠데타는 진압되었고, 탄핵되었고,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그러나 이게 웬일, 다시 탈옥했다. 이제, 다시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도래하였다.
궁리의 허술한 기획 이래 다른 출판사에서 헌법을 다룬 야무진 책들이 많이 나왔다. 시각적 효과를 곁들인 좋은 책이 많았다. 궁리는 문학도이자 법조전문 기자로 활약하는 저자를 만나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 헌법재판소의 사정을 치밀한 취재와 당사자들의 끈질긴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준다. 온갖 뇌피셜과 가짜뉴스가 판치는 부박한 언론 환경에서 이 책은 팩트가 아닌 건 단 한 줄도 없다.
아마 그간 세상의 관심은 헌법재판소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일 것이다. 워낙 엄중한 사안이니 평결 못지않게 그 보안 또한 중요하다. 그러니 당면한 재판에 관해서야 새 나오는 정보야 있을 수 없겠다. 다만, 지난 사건에 대한 평결 과정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밖에.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우라 했다. 그 말을 증명할 헌법의 수호자로 헌법재판소가 등장하였다. 헌재를 온 주권자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다시 한번 이 글의 4항을 적는다. 지금도 눈앞은 안간힘을 다해 아무 일 없는 듯, 그런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이 고요한 정밀, 정중동의 기민한 움직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궁리출판에서 이 책을 다시 내면서 부제를 새로 붙였다. 그것은,
불의에 맞서는 칼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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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영화 │누아르와 역사
<그림자 군단> | 1969년 | 장피에르 멜빌
🤔꿍꿍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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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 영화하면 구독자 여러분이 떠올리는 제목은 무엇인가요? 저는 일단 <존 윅>, <무간도>, <신세계>,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등등이 떠오르네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어두운 세태를 배경으로 부패하고 야만적인 인물들, 가학적인 폭력과 허세를 부리며 뒤통수치는 관계도, 비리고 불결하며 지저분한.. 이를테면 피 냄새나는 자극을 주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누아르 영화가 나와서 그런지, 혹은 너무나 자주 그와 같은 자극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많은 어느 순간 관객들은 누아르를 "알탕 영화"라고 조롱하는 등 식상하게 여기곤 했는데요. 인물들이 수행하는 과잉된 남성성과 그들이 그리는 우정이 결국엔 모략과 배신, 돈과 권력에 대한 모사체로만 반복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이유 중에 뭣보다 그 과잉된 남성들이 남성이 되지 못한 '피메일(female)'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말씀드려 봅니다.
물론 남성성에 미달한 남성들(female)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을 두고 이들이야말로 남성이라고 자꾸 억지를 부린다면 약간의 화가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아르 영화라면 모름지기 "진짜 남성"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이 든 건 최근 4K 리마스터링하여 개봉한 장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 관람 직후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죽음 앞에서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폭력을 정의랍시고 교조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 앞에서 지켜야 하는 엄정함 때문이었을까요? 혹은 부채감 때문이었을까요? 나치 괴뢰 정부에 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을 다룬 <그림자 군단>에는 누아르 영화에 대한 편견을 가뿐히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영화는 1943년 10월, 비시 정권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합니다. 프랑스사에서는 나치에 부역한 괴뢰정권이라는 오명을 가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조금만 찾아봐도 비시 프랑스의 관료들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로 유대인을 추방하고 저항군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학대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더불어 프랑스 경찰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망명자 등을 체포했으며 이때 수용소로 추방한 유대인 중 최소 72,500명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항군, 일명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시설을 폭파하고, 장교를 암살하고, 동료를 구출하는… 영화에서 재현되는 일제시대 독립투사와 무척 비슷한 모습이죠. 전 국민이 공유하는 저항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 같은 기억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만들어진 민족신화라는 설득력 있는 비판이 대두하게 됩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광복군의 이미지에도 비슷한 비판이 있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창작물 전반을 모두 거짓이라고, 날조된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복잡한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멜빌의 <그림자 군단>은(그리고 일군의 레지스탕스와 광복투사 이야기는) 미래에 기대하고픈 인간상과 앞날을 위한 비전에의 투사가 아니었을까요? 일군의 알탕 누아르들이 남성에 미달한 남성들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이듯, 저항 투사들을 다룬 시대극 또한 굴종과 예속에 대한 징후이자 회복에의 의지일 수 있겠습니다. 이번 달, <그림자 군단>을 보신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강력 추천드리며 이만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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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글자 아넥도트│다스릴 治에 관하여
李甲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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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중학교 도덕 시간에 배웠다. 지금도 이 말과 함께 이 말을 했다는 저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쾌하게 발음하던 선생님의 음성이 낭랑하게 귓전을 울린다. 이 말에 따라도 그렇고, 눈만 뜨도 그렇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복수로 존재하고, 여럿이 어울려 살아야 한다.
말은 좋은데 부작용이 있다. 교실에서도 등수가 생기고 사회에서는 계급이 있으며 그래서 여러 난해한 사회학적 용어도 생기는가 보다. 그러던 그 언저리에서 정치라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정치라는 말은 서구문명을 수용하면서 생긴 번역어이다. 옛날 정치는 그냥 한 글자인 정(政)으로 다 통했다. 굳이 필요하다면 정사(政事)라는 말을 썼다.
요즘 자주 인용하는 정자정야란 논어의 명구를 보아도 치(治)가 없어도 사람들의 사회살이를 충분히 대변한다. 政者正也. 정치라는 건 바른 것이라는 뜻. 굳이 다스린다는 뜻의 ‘치(治)’가 없이 그냥 정사(政事)로 사회적 상식을 실천하는 행위를 다 갈음하였다. 그러다가 인구, 지역 등의 규모가 커지면서 일사불란(一絲不亂)의 군사력이 필요해지면서 강제력이 구비된 정치가 생겨났던 게 아닐까.
오늘날 정치,라고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죽어도 쉰내 나는 입만 동동 떠오른다는 국회의원들, 권력의 우두머리가 행사하는 물리력, 지배정당의 횡포, 권력자의 억압,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법률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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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治)는 바람이 풀을 눕히는 것처럼 다스린다는 의미 외에 치유, 치료한다는 의미도 있다. 글자의 깊은 의미를 따진다면, 정치도 다스림에 앞서 상대를 헤아리고, 보듬고, 살리고, 살펴서 치유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입춘 지나고 봄기운 가득한 야생화 찾아서 거제도를 찾았다. 이즈음 가장 먼저 피는 향기로운 꽃을 틔우는 백서향나무의 꽃을 영접하기 위함이었다. 예년과 달리 아직 매서운 추위라 나무도 개화시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제의 명산, 노자산에 올랐다. 이름도 그야말로 老子山이다. 케이블카가 있고, 관광지로 꾸민 곳에서 멸치를 만났다. 원래 거제는 멸치로 유명한 곳이다. 거제에서는 정치의 꼭대기인 대통령을 둘이나 배출한 섬이다. 그중에서 한 대통령은 부친이 멸치잡이로 번 돈을 아들의 정치후원금으로 아낌없이 지원했다고도 한다.
멸치는 蔑治였다. 왜 이 국민 생선에 ‘업신여길 蔑’, ‘다스릴 아니 치유할 治’를 쓸까.
식당. 거제에서 추어탕을 잘 끓여낸다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웬만한 끼니를 때울 때마다 멸치의 신세를 지지 않기란 정말 힘들다. 추어탕이 나오기 전에 먹음직한 반찬을 보기좋게 진설해 주셨다. 나의 젓가락은 어김없이 멸치 하나를 먼저 집는다. 저 먼바다에서 여기까지 오도록 똘망똘망 눈을 잃치 않은 멸치. 나는 한 마리를 통으로 입으로 영접한다. 멸치가 나를 다스린다, 아니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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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추천도서 | 세상을 편집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 정영목 | 문학동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 홍한별 | 위고
─『번역: 황석희』 | 황석희 | 달
👩🏫비블리오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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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쯤, 한 유명인사의 에세이를 준비하던 편집자 친구가 “무대 뒤에 있기 답답하네, 이제 나도 그 위로 올라갈래.”라고 했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 유명인사의 이야기를 대필작가가 인터뷰를 해서 써왔는데, 원고를 교정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자신이 써내려가던 참이었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책이라는 무대 뒤, 영화의 자막 한켠, 박물관 전시 준비실에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영목, 홍한별, 황석희, 이 세 번역가의 책은 그 무게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번역이라는 행위의 의미와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어려움, 인간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정영목 번역가는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번역이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 행위가 단순한 기계적 작업이 아닌 해석과 상상력이 동반된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홍한별 번역가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등장하는 흰 고래를 비유의 대상으로 삼아, 완벽하게 가닿을 수 없는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의 공허와 침묵,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황석희 번역가의 『번역: 황석희』는 세 권 중 가장 경쾌한데, 그는 번역이 어떤 감동과 정서, 그리고 유머와 위트 등을 최대한 잘 전달하는 인간적인 작업이었으면 한다고 전합니다.
세 번역가가 쓴 책에서 저는 ‘가능성과 시도’라는 키워드를 건졌습니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이들은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했을 것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보기 얼마나 많은 날들을 보냈을까요. 언어와 언어를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 이들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멋진 책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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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탑이고, 배신이고, 교환이고, 광기이자 광기의 치료제이고, 길들이기이자 낯설게 하기이고, 조각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고, 빵이자 결핍이고, 틈새이고, 메아리이고, 거울이고, 다시 탑이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번역은 흰 고래이다.”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24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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