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에 찾아온 궁리함입니다. 가벼운 전단지처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않게 볼륨감 있는 4통이 되었네요. 궁리의 이번 신간 『편지로 글쓰기』에는 자기소개서, 일기, 감상문, 기행문, 설명문, 에세이, 소설 등 편지로 쓸 수 있는 수많은 장르의 글이 등장하는데요. 레터를 준비하며 살펴보니 신간 소개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 공식』 편집 후기, 이갑수 대표의 한자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절기-록>: 💌 마케터의 답신까지 여러 형식의 편지로 가득해 새삼 놀라게 되었답니다.

그간 궁리함을 모은 아카이브 페이지도 업데이트 했습니다. 레터 상단 우측에서 지난 서신을 확인해보거나, 놓친 소식들 언제든지 찾아보실 수 있으니 많이 놀러와 주세요. 하단에는 다음주에 있을 『관계의 수학』 북토크 소식도 마련했으니 오프라인에서 뵐 분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궁리함과 함께 구독자 여러분도 편지로 글쓰기에 도전해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궁리함에 의견 넣기> 버튼은 항상 열려있으니, 간단한 안부 남겨주세요😉

절기-록 (2) │ 대표님께,

꿍꿍이

저번 주말엔 날씨가 맑았고 답신을 보내는 이번 주중에는 날이 흐리네요. 마치 제 마음 상태와 같습니다. ‘절기-록’이란 제목을 제안해놓고 저는 정작 절기보다는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 사는지라 흐리면 괴롭고 맑으면 조금 괜찮은 삶을 산다고 느낍니다. 제가 어떤 생각으로 서신교환 기획을 꺼냈을까,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떠올리려 해도 의식적으로 저항하게 되지만, 열과 성을 다해 스타트를 끊어주시니 신입의 도리로서 열정을 가지고 절기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책임을 어렴풋이나마 갖게 됩니다. 우수(雨水)가 당도하면 풀어놓을 이야기 보따리가 있다고 하셨지요. 찾아보니 이미 지나 내년에 도래할 절기더군요. 그건 이 서신을 내년까지 이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신 걸까요? 그 앞에서 저의 미력한 관심은 하릴없이 딴생각으로 향했습니다.

“인간은 날씨의 아들”이라는 대표님의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혹시 <날씨의 아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비가 하루도 그치지 않는 대재난 속에서 잠깐이나마 날씨를 맑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능력을 알선하는 알바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맑은 날씨 출장 서비스로 돈도 쏠쏠히 벌고 입소문이 퍼져 ‘100% 맑음 소녀’로 방송의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위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자아이는 능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몸이 사라지는 페널티가 있는데, 그렇게 액체가 되어 산제물로 바쳐지면 날씨가 예전으로 돌아온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우리의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함께하려면, 비가 내리는 재난 상황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기후재난을 암울한 출판계 상황의 은유로, ‘100% 맑음 소녀’는 이동진 평론가를 비롯한 도서 인플루언서들에 대입해보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요? 저는 오늘 하루에도 출판 마케터들이 도서 인플루언서들에게 보내는 제안서의 양을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지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출판계는 영화의 결말처럼 인플루언서의 능력을 빌리지 않고 아름다운 폐허, 예컨대 전철 대신 수상버스가 운행하는 도쿄도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때 전철은 무엇이고 수상버스는 무엇이지요? 우리의 출판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급발진을 비롯한 여러 결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새 대표님이 사랑하시는 한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식이 다소간 위안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유준주행(前有樽酒行)>이라는 시인데요. “흐르는 세월은 사람을 속이며 무심코 지나간다.” “그대 여전히 청춘의 명랑함을 간직하고 있어도, 머리는 벌써 백발이다. 불평한들 무슨 소용인가.” 원문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서양 것들”이라고 표현하신 외국 작가가 인용한 부분이거든요. 한때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이끌었던 기 드보르의 회고록인데, 저 이백의 시를 언급하고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절대로 불평할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과한 비장함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 “표범은 자기의 무늬를 그대로 지니고 죽는다”로 서두를 뗀 문장은 그보다 훨씬 비장합니다. “힘든 시기에도 나는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다. 좋은 시기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절망적인 시기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1972년에 해체되었고 드보르는 회고록 『파네지릭』을 1989년에 발행했습니다. 그는 1994년 11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삶을 마감합니다. 회고록에 남긴 <인쇄소를 위한 메모>에는 연도 표기부터 숫자 크기, 쪽수 배치까지 구체적인 지시사항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자주 감명받곤 했지만 이젠 드보르식 결말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보단 비장함이 끌어당기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날씨의 아이>는 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빛으로 막을 내립니다. 비 온 뒤에 하늘이 갠다고 하죠. 당연한 말로 여기지만 정작 비가 올 때는 그 말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여기까지 쓰고 보니 출판단지도 어느새 화창해졌습니다. 제 기분도 나란히 좋아지네요. 그러고 보면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절망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살아가며 인플루언서를 살펴보고 제안서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져요. 중국발 황사 소식이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외출하실 때 마스크 꼭 챙기시길요. 항상 지금처럼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총총.

궁리의 새 책 | 『편지로 글쓰기』

: 첫 문장 쓰기가 어려운 사람을 위한 어느 편지큐레이터의 처방전

| 윤성희 지음

🦆더기

편지로 글쓰기? 편지 쓰기인가?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말 그대로 편지로 글쓰기, 서간체 글쓰기 비법을 담은 책입니다. 『목요일의 작가들』에서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한 글쓰기 수업 10년을 소개한 바 있는 윤성희 작가가 이번 책에서는 글쓰기 초심자를 위해 서간체로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글을 소개합니다. 에세이, 기행문, 감상문, 일기 등등 다양한 종류가 담겨 있어요.

편지로 글을 쓰면 어떤 점이 좋을까요? 첫째, 문장 구조를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쓰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쉽게 글로 옮길 수 있어요. 초심자에게는 생각을 문장으로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 수정은 차후의 일입니다.

둘째, 불특정 다수에게 평가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독자가 생긴다는 건 고맙고 반가운 일이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글을 평가받는 것이기도 해요. 이때 아는 사람 한 명이 읽는다고 생각하고 쓰면 부담감이 줄어듭니다.

셋째, 한 편을 써도 다양한 시각에서 쓸 수 있습니다. 서평을 쓴다고 가정해볼까요? 우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에게 쓸 수 있어요. (무생물도 당연히 가능합니다.) 다음으로는 작품을 쓴 작가에게 쓸 수 있겠고, 이 책을 읽을 다른 독자에게 쓸 수 있겠네요. 이처럼 수신인(독자)을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는 게 서간체 글쓰기의 강점입니다.

넷째, 다정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편지를 받았을 때, 거기에 있는 문장 구조며 맞춤법을 하나하나 분석하시나요? 나를 향한 글쓴이의 마음이 가장 먼저 보일 거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답장을 하고 싶어집니다.

이 책은 서간체 작법이 담긴 실용서이기도 하지만, 쓰기 위해 오늘도 빈 화면(혹은 백지) 앞에서 분투하는 사람에게 저자가 보내는 다정한 편지이기도 해요. 본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편지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누구에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당신의 수신인이 되어주겠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데, 글도 다정한 글이 살아남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궁리함에는 윤성희 작가의 인터뷰가 담긴 ‘책 밖에서 만난 작가’ 코너가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더 읽기]

한(漢)글자 아넥도트 │ 바람 風에 대하여

李甲洙

꽃산행 가서 숲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가
이런 사나운 욕심 슬며시 일어나기를
이 썩어가는 나무 사이에, 너덜겅 돌 틈 사이에
혹 고대로부터의 잔존물이 있을까.
 
괜히 바위 아래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삼국유사 한 대목처럼 따뜻한 돌 하나 있을까
웅크린 곰의 등 같은 바위를 문지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해외토픽에서 보기를
중국을 여행하던 어느 눈먼 영국인이 골동품 시장에서
무심코 골라잡아 산 접시가 알고 보니
명대의 희귀한 명품이라서 수십 억 원을 횡재했다는 사례처럼
혹 그런 일 일어나기를 바라는 못난 마음의 작용이기도 하고.
 
그런 허무하고 맹랑한 요행을 바라다가도
지난밤 억수같이 퍼붓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누대에 걸친 비바람
태풍과 폭설, 뜻밖의 기후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음조차 빨갛게 태우는
따가운 햇살을 생각하자면 그게 가당키나 하겠나 싶은 터였는데.